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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 항일운동 중심…보수·진보 싸움터된 덕수궁 대한문 수난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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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데이트

쌍용차 노조·태극기집회, 대한문 앞 충돌 

지난 4일 오전 서울 중구 대한문 앞에 마련된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 고(故) 김주중 씨 추모 분향소 주변에서 경찰들이 대한문 앞 집회를 벌여온 보수단체와의 충돌을 우려해 근무를 서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4일 오전 서울 중구 대한문 앞에 마련된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 고(故) 김주중 씨 추모 분향소 주변에서 경찰들이 대한문 앞 집회를 벌여온 보수단체와의 충돌을 우려해 근무를 서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4일 오후 2시 서울 중구 덕수궁 대한문 옆은 아수라장이었다. 금속노조 쌍용차지부(쌍용차 노조)가 전날 세운 분향소를 놓고 태극기행동국민운동본부(국본)와 쌍용차 노조가 충돌했기 때문이다. 국본 관계자들은 분향소를 둘러싸고 “광화문으로 가라”고 소리쳤다. 곡소리를 내며 쌍용차 노조의 추모사 낭독을 방해했다. “사람이 죽었다"며 고함치는 쌍용차 노조원과 국본 관계자가 충돌해 경찰이 가까스로 막았다.

지난 4일 오후 서울 중구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왕궁 수문장 교대식이 열리는 모습을 관광객들이 바라보고 있다(왼쪽사진). 같은시각 바로 옆에선 쌍용차 노조와 태극기행동국민운동본부 측이 분향소 천막을 설치해 자리하고 있다. [강주안 기자]

지난 4일 오후 서울 중구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왕궁 수문장 교대식이 열리는 모습을 관광객들이 바라보고 있다(왼쪽사진). 같은시각 바로 옆에선 쌍용차 노조와 태극기행동국민운동본부 측이 분향소 천막을 설치해 자리하고 있다. [강주안 기자]

같은 시각 분향소에서 10m도 안 떨어진 곳에선 왕궁 수문장 교대식이 열렸다. 하지만 사진을 찍던 외국인 관광객 중 일부는 교대식 관람을 멈추고 아수라장이 된 분향소 주변을 봤다. 대한문 옆을 지나던 일부 시민은 분향소 주변 인도를 피해 차도로 걸었다. 시민 김주현(29)씨는 “어느 단체가 집회하든 상관없지만 고함을 치며 통행에 불편을 주는 모습은 불쾌하다”고 말했다.

대한제국 황궁 정문…항일집회 중심지

1905년 을사조약 체결 당시 경운궁 대안문(현 대한문) 앞에 모인 민중들에게 일본군이 무력시위를 하고 있다.[사진 문화재청]

1905년 을사조약 체결 당시 경운궁 대안문(현 대한문) 앞에 모인 민중들에게 일본군이 무력시위를 하고 있다.[사진 문화재청]

덕수궁 대한문은 역사적으로 민중의 의견 표명 장소였다. 덕수궁 정문(당시는 인화문) 앞에선 1898년 10월 8일 독립협회와 황국중앙총상회가 집회를 열었다는 기록이 있다.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엔 항일운동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3·1운동 당시 대한문 앞에 모인 군중은 일제 측 기록에 1만명이 넘었다고 한다. 대한문은 대한제국 황궁인 덕수궁(경운궁)의 정문이다. 동문이었다가 1906년 기존 정문인 인화문의 지위를 물려받고, 이름도 대안문에서 대한문으로 바꿨다.

2012년 쌍용차 노조, 분향소 설치

지난 6일 오후 서울 중구 대한문 앞에서 금속노조 쌍용자동차지부가 마련한 해고 노동자 고(故) 김주중 씨 추모 분향소와 친박 단체인 태극기행동국민운동본부가 마련한 '연평해전 천안함 46용사 3.10 순국열사 분향소' 사이 충돌을 우려한 경찰이 근무를 서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6일 오후 서울 중구 대한문 앞에서 금속노조 쌍용자동차지부가 마련한 해고 노동자 고(故) 김주중 씨 추모 분향소와 친박 단체인 태극기행동국민운동본부가 마련한 '연평해전 천안함 46용사 3.10 순국열사 분향소' 사이 충돌을 우려한 경찰이 근무를 서고 있다. [연합뉴스]

100여년이 흐른 지금은 보수·진보의 대립 공간이 됐다. 대한문 옆 돌담길엔 지난 3일부터 푸른색 천막 4채가 늘어서 있다. 국본의 분향소 천막 3채와 쌍용차 노조의 분향소 천막 1채다. 이날 새벽 국본 및 보수단체 회원들은 이곳에 ‘연평해전 영웅 순국열사 분향소’ 등을 설치했다. 같은 날 오전 11시엔 쌍용차 노조가 지난달 27일 스스로 목숨을 끊은 쌍용차 해고자 김주중(49)씨를 추모하는 분향소를 차렸다. 설치 직후 반발이 컸지만, 현재는 진정된 상태다. 경찰 중재로 쌍용차 노조 측이 분향소를 국본 측 분향소 10여m 옆으로 옮겼기 때문이다. 현재 양측 천막 사이엔 폴리스라인이 처진 채, 4~5명의 경찰이 이를 지키고 있다.

2012년 10월 24일 안철수 당시 무소속 대통령후보가 대한문 옆 쌍용차 해고노동자자 복직을 요구하는 천막 농성장을 방문했다.[중앙포토]

2012년 10월 24일 안철수 당시 무소속 대통령후보가 대한문 옆 쌍용차 해고노동자자 복직을 요구하는 천막 농성장을 방문했다.[중앙포토]

대한문에 분향소가 등장한 건 지난 2013년 이후 5년 만이다. 쌍용차 노조는 지난 2012년 4월 분향소를 만들었다. 2009년 쌍용차가 대량 정리해고를 단행한 후 목숨을 스스로 끊거나 사망한 쌍용차 노동자 및 가족을 추모하기 위해서다. 이후 제주 해군기지 반대 단체, 용산 참사 철거민 단체들도 천막을 세웠다. 관할 지자체인 중구는 자진 철거를 요구했지만, 노조 측은 거부했다. 2013년 3월엔 천막촌에서 불이 나 천막 2채가 불타고, 덕수궁 담장과 기와가 그을리는 일이 발생했다.

서울 중구는 지난 2013년 4월 4일 새벽 전격적으로 덕수궁 대한문 앞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의 농성 천막을 철거했다. 철거한 천막 자리에는 곧바로 흙 40t을 부어 화단을 조성했다.[중앙포토]

서울 중구는 지난 2013년 4월 4일 새벽 전격적으로 덕수궁 대한문 앞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의 농성 천막을 철거했다. 철거한 천막 자리에는 곧바로 흙 40t을 부어 화단을 조성했다.[중앙포토]

1달 뒤인 2013년 4월 4일 오전 5시 50분. 중구 공무원 50여 명은 기습적으로 분향소를 철거하고 빈자리에 화단을 조성했다. 쌍용차 노조가 대한문 앞에 분향소를 만든 지 1년 만의 일이다. 쌍용차 노조는 결국 분향소를 평택 쌍용차 공장 앞으로 옮겼다.

2016년부터 태극기집회 주요 활동지

박근혜 전 대통령 지지자들이 지난 4월 7일 서울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열린 태극기시민혁명운동본부 주최 태극기 혁명 국민대회에서 태극기와 성조기를 흔들며 박 전 대통령의 1심 선고 판결에 대해 규탄하고 있다. [뉴스1]

박근혜 전 대통령 지지자들이 지난 4월 7일 서울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열린 태극기시민혁명운동본부 주최 태극기 혁명 국민대회에서 태극기와 성조기를 흔들며 박 전 대통령의 1심 선고 판결에 대해 규탄하고 있다. [뉴스1]

대한문은 3년여 뒤 또 주목 받았다. 2016년 말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가 발생하면서다. ‘촛불집회’ 세력에 대항하던 ‘태극기집회’ 시위자들이 대한문 앞에 모였다. 박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심판, 국정농단 재판 등이 이어지며 태극기집회 세력은 대한문 앞 광장을 현재까지 약 2년간 주요 활동지로 삼고 있다.

쌍용차 노조와 국본의 '대한문 동거'는 장기화할 것으로 보인다. 쌍용차 노조 측은 김주중씨의 49재(8월 14일)까지 대한문에 분향소를 유지할 뜻을 보인다. 국본 측도 “대한문에서 물러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집회도 매일 열 예정이다. 5일 기준으로 쌍용차 노조 측은 8월 1일까지, 국본 측은 8월 5일까지 매일 집회를 신고해 놨다.

하지만 두 단체가 설치한 천막은 모두 불법이다. 관할 구청의 허가 없이 인도에 설치해 도로교통법을 위반했기 때문이다. 중구청 관계자는 “양측 모두 허가를 받지 않았다”면서도 “집회 장소로 신고가 된 곳이니 상황을 지켜보겠다”고 말했다.

서울시 “대한문 앞 화단 철거할 것”

서울시는 서울 중구 덕수궁 대한문 앞에 조성한 화단을 철거할 방침이다. 사진은 지난 6일 오후 덕수궁 대한문 앞 화단의 모습. [뉴스1]

서울시는 서울 중구 덕수궁 대한문 앞에 조성한 화단을 철거할 방침이다. 사진은 지난 6일 오후 덕수궁 대한문 앞 화단의 모습. [뉴스1]

새로운 변수도 생겼다, 6일 서울시는 대한문 앞 화단을 철거하기로 방침을 정했다고 밝혔다. 지난 5월 중구가 “보행 불편 등으로 민원이 발생한다”며 화단 철거를 요청한 걸 받아들인 것이다. 대한문 앞 화단의 관리 주체는 지난 2015년 10월 조례가 개정되며 중구에서 서울시로 바뀌었다. 서울시는 조경·문화재 전문가 등으로 구성된 자문위원회에서 철거를 논의할 예정이다. 다만 서울시 관계자는 “대한문 앞에 설치된 천막들이 어느 정도 정리돼야 철거가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승호·홍지유 기자 wonderm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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