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 칼퇴근에 시니어끼리 야근 … 주 52시간제 요지경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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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1호 08면

초과 근로시간을 줄인 근로기준법 개정안이 이달부터 시행됐다. 2004년 주 5일제 도입 이후 14년 만에 일터에서 벌어진 가장 혁명적인 변화다. 근로시간을 주 52시간으로 제한하면서 기업 분위기가 바뀌고 있다. 하지만 기업규모에 따라 적용시기가 다르고 위반시 법인 대표에 대한 처벌이 6개월 유예되면서 기업이나 근로자 모두 눈치만 보고 있다. 오히려 기업 현장에서는 20·30대 직장인들과 40·50대 중간관리층 이상의 갈등이 불거지는 양상이다.

주 52시간제 도입 일주일 #업무량 같은데 월급만 줄까 걱정 #야근·휴일 수당 신청 땐 눈치 #형식적 출퇴근 지침에 골머리 #외국계 기업은 수시로 본사 연락 #심야 e메일·전화 등 무료 봉사도 #전문가 “탄력 근로제 확대 시급”

“할 일은 그대로인데 처리만 복잡”

“요즘 컴퓨터 대신 수첩에 고객 요구사항이나 투자처, 환율 등을 빼곡하게 적어두기 시작했어요.” 시중은행 지점장 K(51) 씨의 근로시간 단축 대비책은 수첩이었다. 오후 7시 이후에 업무용 컴퓨터가 켜져있으면 본점에서 퇴근하라는 재촉 전화가 오기 때문에 낸 궁여지책이다. 주요 고객의 상담 전화는 시도때도 없다. 그때마다 수첩에 적어둔 고객의 자금과 포트폴리오를 보면서 상담해준다. 상담 내용은 다음날 출근해 컴퓨터에 다시 입력한다. K 지점장은 “업무량은 그대로인데 형식적인 지침을 지키다보니 처리 방법만 복잡해졌다”고 한숨을 쉰다.

“출·퇴근할 때 단말기에 사원증을 찍는 대신 ‘PC 오프’ 하는 것으로 바뀌었다는 정도죠.” 제약업체에 근무하는 Y(43) 차장은 오전 8시30분 회사에서 지급한 노트북을 켰다가 오후 5시30분에 전원을 끈다. 노트북을 켜고 끄는 장소는 대부분 자동차 안이다. 영업 담당인 그는 하루에도 경기도 인천·수원 등지의 약국·마트 등 거래처 10여 곳을 돈다. 가끔 부산이나 광주 거래처에 보낸 제품이 문제가 생기면 주말에도 출장을 다녀온다. Y차장은 “예전보다 야근이나 휴일수당을 신청할 때 눈치가 보인다”며 “일은 바뀐 게 없는데 월급이 줄어드는 게 아닐지 걱정”이라고 말했다.

52시간 첫 주를 맞은 대기업과 주요 유통업체에서는 “올 들어 근무 시스템을 바꿔 큰 문제가 없다”는 반응이다. 내년 7월까지 도입이 유예된 시중은행들도 조기 도입보다는 전국금융산업노동조합과 금융산업사용자협의회의 협상 결과를 지켜보고 있다.

“속사정은 빛좋은 개살구”

“오히려 회사가 어렵다고 출근 시간을 한 시간가량 당겨서 오후 8시까지 하루 12시간을 근무하고 있어요.” 중견 건설업체에서 마케팅을 담당하는 L(32)씨는 “이달부터 근무제 단축이 시행됐지만 아무런 변화를 느끼지 못한다”고 말했다. 52시간 근로제가 시행되기 전에 건설팀 등 부서를 쪼개 법망을 피했기 때문이다. 지난해부터 중견·중소기업 최고경영자(CEO) 사이에선 ‘기업 쪼개기’가 유행했다. 300명 이하 사업장에선 2020년 이후 근로시간이 적용돼 2~3년을 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표면적으로는 워라밸을 우선시하는 모범 회사지만 속사정은 빛좋은 개살구죠.” 외국계 의류회사에 다니는 C(41)씨는 오후 6시에 퇴근해도 오후 9시부터 미국 본사에서 쏟아지는 e메일과 전화에 응대한다. 당연히 근무시간에 포함되지 않는 ‘무료 봉사’다.

근로시간 단축에 적응하기 어려운 기업들은 근무시간 중 휴게시간을 늘리거나 업무시간 중간에 개인적인 일을 본 것으로 전산시스템에 입력하라고 강요하는 등의 편법을 쓰기도 한다.

“취업한 지 8년 만에 처음으로 저녁이 내 시간이네요.” S(36)씨 회사는 지난 3월부터 하루 최소 4시간 이상, 주 40시간 근무하는 방식으로 시스템을 바꿨다. 하루 한 시간씩 4일 간 초과근무를 하면 금요일엔 4시간만 일해도 되는 식이다. 이달부터 영어학원에 등록했다는 S씨는  “상사 눈치보면서 저녁 먹고 늦게까지 일하는 것보다 주어진 시간 안에 집중해서 일을 끝내니 업무 효율성이 좋아진 거 같다”고 말했다.

“근무시간 줄인다고 나라 망하나”

“주 52시간도 짧지 않아요. 나라 망할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을 보면 이해가 안 가죠.” 중소기업에 다니는 과장급 직원 A씨의 말이다. 이 회사는 2020년까지 유예 대상이지만 시뮬레이션을 해보고 있다. A씨는 “해보기도 전에 개탄을 하며 재량 근로를 도입하자는 임원을 보면 짜증이 난다”며 “여유가 있는데도 추가 고용은 생각하지 않고 현상유지에 급급한 관리자들도 문제”라고 말했다.

젊은 세대는 삶의 균형을 찾으려는 추세다. 이들은 52시간 도입이 “당연하다”고 입을 모은다. 한국 근로자의 1인당 연평균 노동시간은 2069시간(2016년 기준)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보다 300시간이 많다. 주 52시간씩 52주 근무하면 2700시간이 넘는다. 52시간도 적다고하면 도대체 얼마나 일을 해야 하느냐는 것이 젊은 세대의 항변이다.

“결국 10년 이상 함께 일해 온 시니어급 팀장들만 남아서 밤늦게까지 일을 해요.” 광고회사를 운영하는 L(45) 사장은 20대, 30대 초반 직원들이 저녁 6시만 되면 뒤도 안 돌아보고 퇴근을 하는 것이 야속하다. 회사 특성상 신규 프로젝트를 따내면 3~4일 밤샘은 기본이고 주말에도 전체 직원이 달라 붙어서 해야 간신히 기한을 맞출 수 있다.

“미국·영국은 물론 홍콩·상하이에서는 주 70~80시간씩 일하는데 우리만 정시퇴근을 해서 경쟁이 되겠어요?” 증권업체에서 해외분석팀을 이끄는 P(51) 이사는 맡은 업무에 따라 근무시간을 유연하게 적용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20년 넘게 장시간 근무를 당연하게 여겨왔던 40·50세대는 확 바뀐 근무환경이 적응하기 힘들다는 반응이다. 결국 일하는 문화 등을 바꿔야 한다. 일상화된 야근과 회식도 재고해야 한다. 올해 승급 교육을 받은 삼성전자 K(44) 부장도 2박3일 간 최근 시대 흐름, 젊은 직원을 대하는 방법 등을 교육받았다. 그는 “처음엔 신입사원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일만 끝내고 퇴근하는 게 이해가되지 않았다”며 “지금은 세대간 변화로 받아들이고 최대한 근무시간 중에 일의 능률을 끌어올릴 수 있도록 돕는다”고 말했다.

제도 보완도 필요하다. 권순원 숙명여대 경영학부 교수는 “세계적으로 최장 수준의 근로시간을 가진 한국이 절대 근로시간을 줄이는 것은 거부할 수 없는 흐름”이라고 말했다. 또 “부작용을 줄이는 방법으로는 탄력적 근로시간 제도 허용 확대”를 제안했다. 현재 2주와 3개월 단위로 설정된 기간을 4주와 6개월로 확대하는 것이다. 권 교수는 “수출 비중이 큰 한국 기업들이 세계 경기나 수요 변화에 따라 빠르게 대처할 수 있는 완충 장치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야근과 주말근무를 바짝해야 월 250만원 정도 손에 쥐는데 52시간 제한이 생기면 25만~30만원 줄어든대요.” 항공기 청소 등 지상업무 업체에 다니는 L(38)씨는 급여 감소가 제일 걱정이다. 공항 여객 운송과 항공관리업체의 지상직 평균 기본급은 102만원이다. 여기에 직무수당, 연장수당, 조정수당, 상여금과 교통비 등을 더해야 200만원이 된다.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근로시간을 줄인다는데 임금이 줄면 세컨드잡에 나서야 할 판이다.

연장 근로시간 제한으로 월급 7.9% 감소

현재 국내 기업의 60%는 대기업에 부품을 납품하는 1·2차 협력업체다. 전형적인 노동집약적인 산업이다보니 쉼없이 공장을 돌려야 단가를 낮춰 납기일을 맞출 수 있다. 근로시간을 줄인다해도 비용 부담이 커지기 때문에 인력을 더 뽑긴 힘들다.

국회 예산정책처에 따르면 근로자들은 초과근로시간의 감소에 따라 월 임금이 평균 37만7000원 감소한다. 300인 이상 기업 근로자의 경우 연장 근로시간 제한으로 월 급여는 7.9% 감소했으나 299인 이하 사업장의 급여 감소율은 12%를 넘는다.

특히 중소 제조업체 근로자는 기본급이 낮은 대신 수당으로 목돈을 보전해줬기 때문에 타격이 클 수밖에 없다. 현실적으로 중소기업은 근로시간 단축에 따른 임금손실 보전 방안은 마땅치 않다. 권 교수는 “대기업은 기술개발 등 생산성을 끌어올려 임금을 높일 순 있지만 가동률이 한계 지점에 도달한 중소기업은 현재 임금 유지도 어렵다”고 말했다. 이병태 카이스트 경영학과 교수 역시 “정부의 지원 없이는 근로시간에 따른 중소기업 임금 축소는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김창우·전영선·염지현 기자 yjh@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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