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마 한 몸 되어 투혼 불사른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7면

전황을 알리기 위해 전선을 달리는 전령은 그의 말과 운명을 같이한다.
그에게는 오직 이 순간만이 의미가 있을 뿐 어제의 기억도 내일에의 꿈도 떨쳐버려야 한다.
거친 들판과 언덕, 심지어 급류까지도 두려워하지 않는 강인한 정신력과 자신을 송두리째 불살라 버릴 수 있는 거룩한 희생 정신이야말로 그에게 요구되는 덕목이다.
전선을 질주하는 전령의 귀에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생과 사가 혼재되어 있는 전장에서 소리는 아무런 실재감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의 눈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오직 하늘과 땅이 맞닿는 지점을 향한 그의 불타는 두 눈에는 번잡스러운 풍경이 들어올 여지가 없다.
분초를 다투는 전령의 치열한 상황을 스포츠로 재현한 것이 바로 승마 지구력 경기다.
「종합마술 지구력경기」는 지난 21일 1백만명의 넓은 대지를 통과하는 27.6㎞의 길고 험한 경기도 고양군 원당 올림픽 경기코스에서 열렸는데 말을 전문적으로 타는 세계 일류선수들에게도 어렵기만 했다.
49명의 정예선수 중에서 10명이 실격 또는 기권 당했으며 경기를 마친 말 중에서 3마리는 더 이상 잔여경기에 출전할 수 없다는 통고를 받았다.
이탈리아에서 온 11세 된 거세마는 경기가 끝난 다음날 괴로운 신음소리를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평민 출신으로 영국 「앤」 공주의 남편이 된 행운의 사나이 「마크· 필립스」도 절룩거리는 말의 고통을 보다 못해 도중에 스스로 경기를 포기했다.
한국의 숲을 헤치고, 한국의 물을 지나고, 한국의 흙을 밟으며 세계의 말이 차례로 지나갔다.
언덕 내리막길을 전속력으로 내닫고 물보라를 일으키며 웅덩이를 건너는 말의 거친 숨결과 상기된 근육에는 더이상 애완용이기를 거부하는 꿈틀거리는·욕망이 도사리고 있었다.
거리낌없는 질주, 두려워하지 않는 도약, 부끄러워하지 않는 패배, 이 모든 원시적인 생명력이 그 먼 옛날을 그리워하며 송두리째 되살아났다.
현대의 세계에 가장 성공적으로 적응한 부자들이 가장 원시적인 방법으로 승부를 겨루는 다소 아이러니컬한 이 축제에는 공짜구경을 하러온 가난한 사람들의 행렬이 줄을 이었다.
축제가 절정에 이를수록 온 산과 들, 그리고 골짜기에 군집한 사람들의 표정에서도 기쁨이 흘러 넘치기 시작했다. 순간의 부주의로 말 잔등에서 굴러 떨어져 버리는 아찔한 장면이 몇 차례 반복되면서 모든 사람들은 스스로 말을 타고 달리는 듯한 환상에 빠져들었다.
이곳은 더 이상 삶에 지친자들의 괴로운 탄식이 머무르는 곳이 아니라 가장 힘찬 도약을 위해 온힘을 다해 질주하는 희망찬 성소가 되고 있었다.
이제 이 땅에서 처음 열린 세계 명마들의 신바람 나는 한바탕의 축제가 조용히 막을 내리고 이름 없는 구경꾼들만이 남았다.
조금 전까지 지축을 박차고 용솟음 치는 건강과 젊음의 대열이 지나간 자리에 조금씩 늙고, 조금씩 병들고, 조금씩 지친자들이 새로운 대열을 이루기 시작한다.
그들마저 지나간 자리에 가장 마지막까지 남은 것은 그들 스스로는 결코 실체를 파악할 수 없었던 거대한 꿈의 덩어리였다.
전세계의 동물까지 함께 모여 춤추는 장엄한 축제의 마당 종합마술 지구력 경기는 가진 사람이 가난한 사람을 무시하고 못 배운 사람이 배운 자들의 오만을 저주하는 저 끝없는 대립과 불화의 악순환에서 벗어나는 평화로운 세상이었다. <이하경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