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방가구 만드는 이탈리아 3선의원 아르키우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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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8면

"가구는 손바닥이 아니라 손등으로 만져 보세요. 그러면 더 섬세하게 느낄 수 있죠." 65세의 백발 노인은 흰색 원목 식탁을 손등으로 쓸며 눈을 감고 알듯 모를듯한 미소를 지었다. 행복감이 스치는 듯한 표정이었다. "나무 향이 너무 좋아요. 그래서 가구 사업을 시작했죠."

이탈리아 명품 주방가구'베네타 쿠치네'의 쟈코모 아르키우티(사진) 회장을 지난 25일 서울 양재동에서 만났다. 80평 면적의 국내 첫 상설 전시판매장을 여는 자리였다. 그는 1967년 이 회사를 세워 600개가 넘는 자국 주방 가구 브랜드 중 두번째 업체로 키웠다.

지난해 50여개국에 수출해 1억5000만 유로(약 1800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40여년 동안 주방 가구 한 우물만 팠다. 근래 주방과 거실이 융합하는 게 유럽의 트렌드여서 거실 가구를 약간 만들기 시작했을 뿐이다.

"식사는 신성하고 행복한 일이예요. 그래서 주방은 집안에서 가장 중요한 곳이죠. 우리나라에선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하고 좀체로 밥도 먹지 않아요."

대화 도중 "주방은 집의 여왕"이란 말을 여러 차례 했다. 주방 가구를 만드는 일을 일종의 업(業)으로 여기는 것 같았다. 거실엔 TV가 들어서면서 가족끼리 오히려 멀어지고, 침실은 잠 자는 곳일 뿐이라는 이야기도 했다. "저녁에 집에 들어와 대개 가족들과 식탁에 둘러 앉아 대화를 나눕니다."

베네타 쿠치네는 10평 정도의 주방을 꾸미는 기준으로 최소 5000만원에서 1억원까지 호가하는 아주 비싼 가구를 만든다. 원목의 느낌을 살린 전통적 디자인에서부터 '하이 그로시'한(광택을 강조한) 현대적 디자인에 이르기까지 스타일도 다양하다. 중국.인도.파키스탄 등 아시아에서도 부자들에게 인기가 높단다. 한국 진출을 결심한 건 수입.판매를 맡게 된 에넥스의 박유재 (72) 회장을 만나고 나서다.

"한국의 몇몇 업체가 수출 제의를 해 왔어요. 하지만 단지 가구를 파는 회사와는 함께 일하고 싶지 않았어요."

지난해 7월 방한해 충북 영동에 있는 에넥스의 황간 공장을 둘러본 뒤 마음을 굳혔다. "디자인에서부터 생산.판매에 이르기까지 본사가 맡아서 한다는 박 회장의 고집이 저와 일치했어요. 저는 품질 관리를 위해 제품 생산과정의 일부를 외주 준 적이 없어요." 아르키우티 회장은 한국을 베네타 쿠치네의 아시아 시장 생산.판매 기지로 만들고 싶다고 했다.

그는 자국의 3선 국회의원이다. 지난 4월 총선에서 소속 집권여당인 중도우파연합이 패배해 다음달로 의원 임기가 끝난다고 했다.

사업과 정치 활동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어려웠냐고 물었다. "정치는 말을 잘하면 되는 일인데 당연히 사업이 더 어렵죠."

한국 사업 파트너인 박 회장이 마침 옆에 앉아 있었다. 아르키우티 회장은 80년대 11대 국회의원(민정당)을 지낸 박 회장을 돌아보며 "그렇지 않느냐"고 물었다. "맞아요. 정치는 말이 앞서요." 두 사람은 식탁을 치며 껄껄 웃었다.

임미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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