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파일] 사랑, 그 절망과 희망이란 두 무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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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제목만 보고 청춘남녀의 데이트용 연애물을 기대한 관객이라면 도중에 자리를 뜰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설령 예상과 다르더라도 끝까지 자리 지키기를 권한다. '내 곁에 있어줘'(27일 개봉)에는 그럴 만한 결말이 예약돼 있다. 숱한 영화가 사랑의 고통에 아파하던 사람들이 희망을 찾는 모습을 그려냈지만, 이만한 무게로 절망과 희망을 동시에 그린 영화를 만나기란 쉽지 않다.

이 무게의 비결은 실존인물이자 극중에서 자신을 직접 연기한 테레사다. 60대 초반의 이 할머니는 십대 시절 청력과 시력을 차례로 잃는 가혹한 운명을 겪고도 현재 당당하게 자립해서 살아간다. 영화는 이 기적 같은 삶을 전기적 드라마로 재구성하는 대신 세 가지 허구적 사랑 얘기와 교묘하게 뒤섞는 희한한 방식을 택한다. 아내를 잃고 생의 의욕마저 잃는 노인, 다른 남자에게 여자친구의 관심을 빼앗기고 괴로워하게 되는 소녀, 미모의 전문직 여성을 남몰래 흠모하는 경비원이 그 사랑의 주인공이다.

영화가 중반이 넘어서도록 테레사는 물론이고, 서로 간에도 별 관련이 없는 듯 보이던 등장인물들은 놀라운 극적 반전을 거쳐 하나의 고리로 연결된다. 이 와중에 드러나는 것은 테레사의 강인한 낙천성이다. 신체기능뿐 아니라 연인을 누구보다도 가혹하게 잃는 고통을 겪은 뒤에도 테레사는 사랑과 행복을 단념하지 않고 살아왔다. 테레사의 이 같은 삶은 영화의 끝 부분에 이르러서 실제와 허구의 경계를 허물며 마치 나비효과 같은 파장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세 인물이 겪는 상실감이 이중장애의 테레사가 겪었던 절망감과 인간의 상처라는 면에서 깊이가 다르지 않음을, 그래서 테레사에게서 위안을 얻을 수 있는 것임을 짐작하게 하는 결말이다.

'내 곁에 있어줘'는 절망과 사랑에 대한 얘기인 동시에 소통에 관한 영화다. 세대가 다른 세 인물의 사랑은 저마다 다른 매체로 상징된다. 노인은 직접 만든 음식을 아내에게 먹이면서, 소녀들은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를 주고받으면서, 경비원은 나 홀로 연애편지를 썼다 찢기를 반복하면서 사랑을 표현한다. 이는 사랑을 잃은 뒤의 고통에도 고스란히 반영된다. 노인의 음식은 먹어줄 사람을 잃고, 소녀의 문자메시지는 답신을 받지 못한다. 경비원의 편지는 언제쯤이나 완성돼 배달될지 의문스럽다.

방식은 달라도 테레사의 삶 역시 소통의 연속이라는 점은 매한가지다. 자원봉사자와 손바닥 글씨로 대화하며 시장을 보고, 목청의 울림으로 상대의 말을 짐작하며 아이들을 가르친다. 대신 이런 테레사의 일상을 묘사할 때 영화의 소리와 속도는 앞서와 크게 다르다. 기이할 정도로 긴 정적이 흐르는가 하면 아주 느릿한 타자솜씨로 사랑과 행복에 대한 문장이 화면 가득 등장한다. 이 낯선 시청각 효과를 견디고 나면, 소리도 빛도 없는 조건에서 세상과 소통해온 테레사의 내공이 체감적으로 다가온다. 인간의 상처에도 침묵과 세월이 약이라는 중의법은 아닐까. 싱가포르 출신 에릭 쿠 감독의 작품이다.

이후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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