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의 진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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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북한의 주석 김일성은 노태우 대통령의 평양방문을「조건부」로 환영했다.
보도에 나타난「조건」을 간추려 보면 먼저 ①남한이 주한미군을 철수시키고 ②남북한이 상호불가침 조약을 체결한 다음 ③북한의 통일방안인 「고려민주연방제」를 남한이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이런 조건들에 대해서는 우리가 액면대로 받아들일순 없다.
김일성 발언은 북한의 정권수립 4O주년 기념일인 「9·9절」행사의 전야제 연설에서 나왔다.
지금 북한은 서울올림픽에 맞서 평양에 세계의 공산국과 제 3세계의 친북한 국가 대표들을 대규모로 초청하여 자축행사를 벌이고 있다.
그 리셉션에서 김일성은 평양이 한반도의 중심이고 자기가 한민족의 최고 영도자라고 과시하기 위해 그런 제안을 내놓은 것으로 추측된다.
우리는 먼저 김일성 발언의 진의를 파악해야 한다. 진의 파악은 두가지 방향에서 이뤄져야 한다.
하나는 김일성이 진심으로 통일문제를 노태우 대통령과 논의하고 싶어하는가 하는 것이다.
다음은 그의 전제조건이 절대적인가, 아니면 수정 가능한 것인가다.
만약 김일성 이조건에 더 역점을 두고 있다면 그의 발언은 성실성이 없는 하나의 제스처에 불과하다고 보아야 한다.
지금 주변환경은 남북대화의 필요성을 더욱 절감케 하고있다.
북한의 두 동맹대국인 소련과 중공이 국제적인 개방과 협력의 노선을 걷고 있다.
그런 원칙은 우리에 대해서도 적용되고 있다. 중소의 올림픽참가와 그동안의 대한 외교발언들이 이 사실을 입증한다.
이제 북한은 스스로의 자세 수정이 필요하다. 올림픽 불참도 자연스럽지 못할뿐 아니라 반정부적인 우리 운동권 학생들을 상대로 문제를 풀어보려는것도 가소로운 일이다.
더구나 올림픽이후 전개될 새로운 개방과 협력의 흐름을 북한이 외면해선 안된다.
이번 김일성 발언이 이처럼 변동하는 정세에 적응키 위해 나왔다면 반대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김일성 제의가 우리 남한동포의 지지를 받으려면 「고려연방제」통일방안을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듯한 태도부터 고쳐야 한다.
북한의 통일방안인 고려연방제에는 남한 4천만 겨레의 의견이 반영되지 않았고 남한에서 반공 관계법의 폐지, 공산활동 합법화, 연공정권 수립, 미군철수, 평화협정체결 등 5가지 전체조건은 남한의 정치체제의 해체를 목적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평화적이고 점진적인 통일을 지향하는 한, 남북 두 체제의 공존은 불가피하다.
그것은 두 체제가 각기 주권을 갖는 독립체제가 횡적으로 결합하는 「국가연합」(confederation)에 이어 제한된 주권을 갖는 국가의 결합인 「연방국가」(federation)의 단계를 거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연방의 형태는 여러가지여서 북한이 주장하는 고려연방제가 최선은 아니다.
그 형태는 어디까지나 남북 겨레가 토론과 합의를 거쳐 결정할 문제이지 북한이 특정형태를 강요할 성질이 못된다.
김일성은 잡다한 전제조건을 철회하고 조건 없이 노태우 대통령과 만나야 한다. 정상회담은 하찮은 과정을 뛰어넘어 기본문제들을 일괄타결 하는데 가장 핵과적인 방식이다.
김일성은 북한을 40년간 통치해봤다는 점에서도 우리는 한반도에 현재하는 기도자중의 한사람임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참된 민족의 영도자가 되려고 한다면 외국사절 앞에서의 제스처에 그칠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남북정상회담에 임해야 한다. 그 회담은 조건없이 조속히 이뤄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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