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되살아나니 '격차 사회'가 이슈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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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양극화 실태와 저소득층의 생활상을 그린 서적들. 『하류사회』『불안대국 일본』『희망격차사회』『하류시대에 적응하기』『중하류층의 충격』등의 자극적인 제목에서 일본 서민들이 느끼는 박탈감을 가늠할 수 있다.

#1 일본 도쿄(東京) 롯폰기(六本木)에 있는 54층 건물 롯폰기 힐스. 정보기술(IT)과 기업 인수합병(M&A) 등으로 초고속 성공한 라쿠텐(樂天).무라카미(村上)펀드와 유력 금융기관 등 40여 개 기업이 입주해 있다. 벤처 성공 신화를 만들어 낸 주인공들의 총본산이다. 이들은 '롯폰기 힐스족(族)'으로 불린다.

#2 오사카(大阪)에서 택시 운전을 하는 아사노 신야(淺野眞也.43). 그는 "생활보호대상자는 정부에서 월 24만엔(약 200만원)을 받는데, 나는 월 평균 수입이 20만엔 이하인 경우도 많다"며 "경제적으로 어려워 자식의 대학 교육이나 부모 봉양을 포기하거나 자살하는 택시 기사들도 많다"고 털어놓았다.

두 사례는 요즘 일본에서 유행하는 '격차(格差.양극화) 사회' '승자와 패자'라는 말을 실감케 한다. '1억 중산층 사회'는 옛말이었다. "일본은 경제 대국이어서 저소득층이라도 못 먹고살 정도는 아니다"는 주장도 있었지만 중산층이 흔들리는 조짐은 곳곳에서 보였다.

요미우리(讀賣)신문이 올 1월 전국의 성인 1797명을 상대로 생활 의식 조사를 했다. 그 결과 '중.상 이상'이 16%, '중류'가 32%, '중.하 이하'가 32%였다. 요미우리는 "1994년 이후 '중.하 이하'가 늘고, '중.상 이상'이 줄어 중류의식이 흔들린다"고 밝혔다. 일본 정부에 따르면 한 푼도 저축하지 못하는 세대가 72년 3.2%에서 지난해는 23.8%로 늘어 사상 최고를 기록했다. 반면 저축하는 세대의 평균 저축액은 지난해 1544만 엔으로 97년(1287만 엔)보다 20% 늘었다.

일본 정부는 아직 공식적으론 '격차 사회론'을 인정하지 않지만 지난달 22~29일 취재진이 만났던 정부.연구소.대학.기업 관계자들은 대부분 "격차 문제가 생겼다"고 인정했다. 총무성이 조사한 지니계수(소득격차 분석 지수)도 79년 0.272에서 2004년에는 0.310으로 높아졌다.

익명을 요구한 30대 정규직 회사원 H씨는 "괜찮다는 기업에 취업해 스스로 중산층이라고 생각했는데 지난해 회사 경영 부진으로 보너스를 못 받은 뒤 중산층이란 생각이 흔들리고 있다"며 "요즘은 일하는 기업 환경에 따라 승패 의식이 확연히 구분된다"고 말했다.

자민당 소속 하나시 야스히로(葉梨康弘) 중의원은 "어느 사회나 격차는 있다"며 "70~80년대 고도성장기에는 경제가 계속 커져 중산층 사회가 가능했지만 지금은 안정사회로 접어든 데다 정부 재정이 악화돼 무작정 지원할 수 없기 때문에 과거(중산층 사회)로 되돌아갈 수 없다"고 말했다.

일본이 걱정하는 것은 지금의 격차 자체보다 앞으로 벌어질 격차다. 격차가 구조화돼 '계층 세습'과'가난의 확대 재생산'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얘기다. 고마무라 고헤이(駒村康平) 도요대 교수는 "과거와 달리 지금은 경기가 회복돼도 소득이 늘지 않는 사람이 증가하는 것이 특징"이라고 말했다. 히구치 요시오(桶口美雄) 게이오대 교수는 "평생고용신화가 무너지고, 비정규직 근로자가 정규직이 되기 어려워져 계층의 고착화로 연결된다"고 걱정했다.

오타케 후미오(大竹文雄) 오사카대 교수는 "부유층 자녀는 비싼 사립학교에서 수준 높은 교육을 받고, 저소득층 자녀는 질 낮은 공교육을 받는다"며 "교육 격차로 계층이 세습화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현재 일본 초.중 학생의 25%가 많든 적든 정부 지원을 받고 있다. 최근 아사히(朝日)신문 조사에 따르면 정부 지원을 받는 학생이 많은 학교일수록 성적이 낮았다.

그 결과 "5년 후의 인생도 모르는데 50년 후를 위해 연금을 내느냐"며 연금을 내지 않는 젊은층이 늘고 있다. 도쿄도에는 놀고먹는 니트족에게 취업 훈련과 정신교육을 시키는 청년자립숙(自立塾)이 있다. 이곳의 이시이 마사히로(石井正宏) 부소장은 "과거에는 열심히 직장생활을 하면 성공한다는 희망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다"며 '꿈과 희망을 잃은 젊은이'가 늘어나는 것을 걱정했다.

◆ 특별취재팀 = 김정수 경제연구소장, 오대영.남윤호.박소영.이승녕 기자, 김현기 도쿄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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