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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용 지표 쇼크에, 재계 일제히 규제개혁 건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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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3면

김동연 경제부총리(왼쪽)와 박용만 대한상의 회장이 15일 서울 광화문 정부서울청사에서 연 간담회에서 규제개혁 방안에 대해 논의했다. [연합뉴스]

김동연 경제부총리(왼쪽)와 박용만 대한상의 회장이 15일 서울 광화문 정부서울청사에서 연 간담회에서 규제개혁 방안에 대해 논의했다. [연합뉴스]

지난 2014년 핀란드가 세계 최초로 시작한 ‘가상 병원’ 프로젝트는 스마트폰만 있으면 누구나 활용할 수 있는 의료 서비스다. 집에 있는 환자가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을 이용해 증상을 입력하면 주치의에게 이 정보가 전달된다. 의사가 전달받은 증상대로 진료한 뒤 병원 방문이 필요하면 환자에게 알려준다. 의사와 간단한 문답만으로 처방이 나올 수 있는 질환인데도 병원에서 수십여분을 대기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사라지는 것이다. 이런 서비스는 핀란드 정부가 환자 의료 정보를 일선 병원과 자유롭게 공유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병원은 이 정보와 환자가 전송한 증상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원격으로 처방도 내릴 수 있게 됐다.

헬스케어 등 규제 개혁해 위기 극복 #재계 ‘핀란드 혁신모델’ 주목 #김동연 “재계 건의 최대한 반영” #우선순위, 개혁 의지에 의구심도

유정주 한국경제연구원 기업혁신팀장은 “핀란드에선 환자 의료 정보의 98%가 정부 데이터베이스에 구축돼 있고, 이를 원격 진료에 활용할 수 있는 제도도 마련돼 있다”며 “한국은 의료법 규제에 막혀 개인이 의료 정보를 모바일로 전송하는 것 자체가 불법인 실정”이라고 지적했다.

핀란드에선 가능한 일이 한국에선 왜 불가능한 것일까. 주요 경제단체들이 일제히 규제개혁을 건의하고 나선 가운데, ‘핀란드 모델’이 재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한경연은 17일 ‘핀란드 위기 경제 극복의 원동력’이란 자료를 내고 핀란드를 벤치마킹하자고 밝혔다. 핀란드는 2012년부터 2015년까지 ‘노키아의 몰락’을 기점으로 4년 연속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다. 하지만 스타트업 육성, 장벽 없는 신산업 규제 등으로 2016년부터 성장률 회복에 성공했다. 최근 고용 지표가 나빠진 한국이 참고할 만한 사례가 한둘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재계는 특히 핀란드의 혁신 사례 중 디지털 헬스케어 산업의 성장을 눈여겨봤다. 핀란드 의회는 2013년 9월부터 개인의 의료 정보를 빅데이터화 할 수 있는 ‘바이오뱅크법’을 통과시켰다. 이 법은 혈액·조직 등 인체에서 채취한 물질과 유전자 정보를 자유롭게 연구에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한국의 경우 시민단체 등의 반대로 개인 정보 활용이 엄격히 금지돼 있지만, 핀란드는 미래 먹거리 산업 성장을 위해 규제를 완화하고 투자도 늘리고 있다. 그 결과 핀란드의 헬스케어 수출액은 지난해 22억2000만 유로(약 2조8300억원)에 달해 전년 대비 5.3% 성장했다.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도 핀란드에선 이미 자리를 잡은 원격의료는 물론 영리병원 허용 등 의료산업 관련 규제가 완화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들 규제만 완화하면 최소 18만7000개에서 최대 37만4000개의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경총은 특히 의료뿐만 아니라 핀테크와 프랜차이즈·드럭스토어 관련 산업 관련 규제도 완화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현재 카카오뱅크·케이뱅크 등 인터넷전문은행들은 금융업을 영위하지 않는 기업(산업자본)의 은행지분 투자한도 규제(은산분리 규제) 탓에 사업 규모를 키우기 힘든 상황이다. 또 2016년부터 제과·제빵 등 외식업에 대기업 진출을 제한하면서 맥도날드 등 해외 대형 외식업체와의 ‘역차별’ 논란도 발생하고 있다. 의사 처방은 필요 없지만 약사가 판매하는 해열제·진통제 등 안전상비의약품은 여전히 드럭스토어를 비롯한 일반 소매점에서 판매가 불가능하다. 약사·한약사가 아니면 약을 판매할 수 없도록 한 현행 약사법 규제 탓이다. 이 조항은 헌법재판소에서도 헌법불합치 판결을 받았지만, 이익단체 반발로 법 개정이 늦어지고 있다.

재계가 마련한 이들 규제개혁안은 과거부터 여러 차례 건의됐지만, 보수·진보 정부를 통틀어 개선되지 못했다. 이 때문에 그동안 왜 규제개혁이 실패했는지 근본적인 원인을 찾고, 규제개혁 방식도 획기적으로 바꿔야 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박용만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이 지난 15일 서울 광화문 정부서울청사에서 김동연 경제부총리를 만나 ‘규제개혁 프로세스 개선 방안’을 브리핑한 것도 그래서다.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대한상의는 공무원의 책임 시비와 감사 부담, 기득권층의 생존권 위협 의식, 국회의 이익단체 편향, 국민의 반기업정서 등을 그동안 규제개혁을 가로막은 장애물로 분석했다. 이를 넘어서려면 한 번에 입법까지 끝낼 수 있는 새로운 규제개혁 프로세스(규제개혁 튜브)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사회적 대립이 큰 사안은 ‘4차 산업혁명위원회’의 해커톤(해커들의 마라톤 회의) 방식도 차용하는 등 공론화 절차를 거쳐, 합의가 쉬운 주제부터 성과를 만들어 가자는 발상이다. 박 회장은 김 부총리와 간담회 전 모두발언에서 “지난 4년 동안 40번에 가깝게 규제개혁 과제를 건의했지만, 상당수가 해결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문재인 정부 경제팀은 최근 급격히 나빠진 고용 지표를 놓고 고민에 빠져 있다. 지난달 전체 취업자 수는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8만명이 줄었다. 한창 일할 나이인 30대 취업자 수도 같은 기간 3만1000명 줄어드는 등 지난해 10월 이후 8개월째 감소 행진을 이어갔다. 이 때문에 정부는 지난 8일 제1차 혁신성장 관계장관회의를 연 데 이어 김동연 부총리가 신세계그룹 등 대기업과 간담회도 갖는 등 혁신성장, 규제개혁 화두를 부쩍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15일 박용만 회장과 김 부총리와의 간담회는 15분을 채 넘기지 못하는 등 정부의 규제 개혁 의지에 의구심도 제기되고 있다.

김 부총리는 간담회 전 박 회장에게 “정부는 속도감 있게 규제개혁을 추진하려고 한다”며 “(재계 건의를) 최대한 반영할 수 있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도년 기자 kim.dony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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