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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의 '최첨단 환자' 문구에 도진 직업병…꼰대 증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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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김성희의 어쩌다 꼰대(48)

일전에 어느 종합변원에 갔을 때 본 문구다. '전문적이고 친절한 의료진'은 좋은데 '최첨단 환자'는 어떤 환자인지... [사진 Freepik]

일전에 어느 종합변원에 갔을 때 본 문구다. '전문적이고 친절한 의료진'은 좋은데 '최첨단 환자'는 어떤 환자인지... [사진 Freepik]

“전문적이고 친절한 의료진과 최첨단 환자 중심의 진료시설을 갖추고 환자 여러분을 섬깁니다.”

일전에 어느 종합병원에 갔을 때 본 문구다. 문병 온 ‘미래의 고객’들에게 소구하려는 일종의 광고인데 엘리베이터 벽에 붙어 있는 걸 보고는 실소가 나왔다. 아니, ‘전문적이고 친절한 의료진’은 좋은데 ‘최첨단 환자’는 어떤 환자를 가리키는 거지 싶어서였다. 아마, ‘환자 중심의 최첨단 진료시설’이라 자랑하고 싶었던 모양인데 ‘최첨단’의 위치가 엉뚱해서 이 같은 코미디를 연출한 것이었다.

문제는 이걸 보고는 볼펜을 들어 고치려 했다는 거다. 다른 승객들이 유난 떤다고 할까 싶어 속으로 생각만 하고 말았지만 말이다. 이게 왜 문제인고 하니 쓸데없이 사소한 것에 예민한 것, 너그러워지기보다 까탈스러워지는 것이 꼰대 증세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퇴직한 친구들을 보면 대개 ‘전문’ 분야가 있다. 세금이면 세금, 인사면 인사, 물류면 물류 등 나름대로 지식과 경험을 쌓았으니 당연하다. 그러니 언론에서 관련 기사를 보거나 주변에서 비슷한 경우를 보면 못마땅해 하고, 나서는 경우가 적지 않다. 받아들이는 쪽이 어떻게 생각하든 참견하고자 하는 것, 이거 일종의 ‘직업병’이다. 그리고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많은 퇴직자가 겪는다. 자신의 노하우가 낡은 것이란 인식이 들기까지는.

내 직업병은 문장에 대한 집착

내 직업병은 문장에 대한 집착이다. 국어학을 전공해서는 아니고 글을 잘 써서는 더더욱 아니다. 단지 30년 넘게 글을 쓰고 10년째 글쓰기 강의를 해서인지 맞춤법, 어법이 잘못된 말이나 글을 보면 신경이 쓰이고 참견하려 든다.

내 직업병은 문장에 대한 집착이다. "아메리카노 나오셨습니다"처럼 사물존칭을 들으면 몸이 오그라든다. [중앙포토]

내 직업병은 문장에 대한 집착이다. "아메리카노 나오셨습니다"처럼 사물존칭을 들으면 몸이 오그라든다. [중앙포토]

예를 들면 이런 거다. “아메리카노 나오셨습니다”처럼 사물존칭을 들으면 몸이 오그라든다. 남의 아내를 높여 부르는 ‘영부인’을 대통령 부인이란 뜻으로 쓰는 사람은 다시 보게 된다. 자기 남편을 애 아빠도 아닌 “아빠, 아빠”하고 일컫는 이에겐 ‘족보도 참’하는 탄식을 삼키게 된다. ‘토 나온다’ ‘염두하다’라고 쓴 학생 글에선 그야말로 토악질이 나올 지경이다.

더욱 가관인 것은 자기 부친, 장인 등을 남에게 이를 때도 “우리 아버님이 차를 사셨을 때” “우리 장모님이 닭을 잡아 주셨거든”하는 이들을 보면 딱하다. 게다가 “우리 아버지는” “지난번에 장모가” 하면 무식하거나 버릇없는 인간말종인 양 몰아세우는 이를 보면 정말 쥐어박고 싶다. 말하는 이로선 존칭을 붙여야 마땅하지만 듣는 이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으니 아무 때나 존칭을 붙여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수많은 독자, 시청자를 상대하는 언론에서는 말할 것도 없다.

우리말을 제대로 쓰기는 사실 만만치 않다. 게다가 내가 잘못 알 수도 있음에도 이리 예민한 반응을 보이니 스스로 생각해도 별나다.

꼰대로 가는 길 늦추는 방법

한데 ‘꼰대로 가는 중’이라 반성하던 차에 결정타를 맞았다. 며칠 전 만난 한 고교 동창이 옛 기억을 들춰냈다. 학생 시절 자기가 “늘비하다”고 했더니만 내가 “즐비하게 늘어섰다 해야지 그걸 그렇게 줄이냐”고 타박을 주었다고 했다. 자기 고향에선 자주 쓰던 말이어서 나중에 사전을 찾아보니 ‘질서없이 여기저기 많이 늘어서 있거나 놓여 있다’란 뜻으로 ‘늘비하다’란 말이 있더라는 얘기였다.

직업병 운운하기 전에 일찍 까탈스러웠구나 싶어 웃어넘기는 한편 반성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는데 절대 나만 옳다고 하지 말아야지, 그래서 꼰대로 가는 길을 늦춰야지.’ 새삼 다짐했다.

김성희 북 칼럼니스트 http://pf.kakao.com/_xfxgQj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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