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한반도 정세 |「냉전터널」 벗어나 대화시대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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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일제의 패망과 해방, 그리고 미소 양국 군대의 진주에 따라 한반도에 펼쳐진 냉전 질서는 남북한에 대립되는 정권을 등장시키면서 이 땅에 분단시대의 막을 열었다.
그것은 해방과 건국의 열광을 반감시키는 비극이었고 그만큼 권력 기반은 파행적인 것일 수밖에 없었다.
한국의 신생 정부는 출범과 더불어 대외적으로 미국 의존적인 군사·경제 협정을 맺고 대내적으로는 북한과의 대결 태세를 굳혀갔다.
미국의 구도 아래 이루어진 한국 사회의 재편 작업은 1950∼53년의 전쟁을 거치면서 분단 고착화와 함께 틀을 잡아갔다.
2차 대전 이후 타국을 전장으로 삼아 강대국이 총력전을 펴는 특징을 지니는 첫「현대전」이었던 6·교는 인명피해 규모에서 인류 전사에 제5위를 기록하는 것이었다.
이 때의 분열과 파괴가 가져다준「삶의 끝」으로 불리는 한반도의 초상은 아직도 지워지지 않는 상흔이 역력하다.
체제의 이질화는 방식을 달리한 남북한의 전후 복구사업을 통해 더욱 심화되었다.
북한은 전후 복구사업을 60년대의 중소이념 분쟁기에 걸쳐 자주 노선을 내세워 중소로부터의 실리를 취하는 한편 철저한 자력갱생 원칙을 일관했다.
이에 반해 한국은 미일에의 경제적 관계를 심화시키면서 정권의 상층부끼리 밀착구조를 형성하였고, 이 과정에서 미국은 태평양의 군사·전략적 차원에서 한국의 권위주의적 정권을 두둔함으로써 80년 이후 반미 자주화 운동을 불러일으키는 소지를 남기는 결과로 되었다.
냉전구조상에서의 미일을 한 편으로 하고 중소를 한 편으로 하는 대립 상황은 남북한 관계의 개선을 저해하는 주요환경으로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북한과는「항미 원조」에 의한 혈맹관계를 과시해 온 중국이 72년「닉슨」미 대통령을 맞아들인 변신은 대립으로 일관해 온 남북한에도 새로운 대응을 요구하였다.
미 중의 관계 개선은 갱년 국교수립으로 정착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동북아 정세에 있어 냉전 구조의 기본적인 해체를 뜻하는 것이었다.
정권간에 공식적인 대화나 접촉창구가 없었던 남북관계는 이를 계기로 새로운 전기로 접어들었다. 미중 해방에 힘입어 7·4 공동성명서가 나오고 분단 이후 처음으로 남북한 접촉이 실현됐다. 서로의 존재마저 정면에서 보지 않으려던 것에서 한국은「북괴」라는 호칭을 이를 계기로「북한」으로 바꾸었다.
남북한의 체제 경쟁시대로 진입한 70년대는 외교적 경쟁의 시대이기도 했다.
한국은 71년의 비 적성 공산국과의 외교관계수립을 명언한 뒤 73년 6·23선언에 걸치는 시기를 전후하여 공업 등 일부 부문에서 앞서있던 북한에 대한 열세를 만회하기 시작했다.
한국은 북한과의 경제적 격차를 점차 벌리면서 70년대의 물량적 팽창을 넘어 80년대 들어서는 분단 극복과 민주화 추구라는 사회의 질적 변용을 거치게된다.
이러한 변화는 중국과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 국가들에서 이념의 획일성을 부정하며 총체적 사회실현을 위한 개혁과 민주화 요구가 거세게 일어난 것과 상응한다.
70년대 후반 중국의 실용주의 체제는 반제·반봉건의 혁명 노선을 벗어 던지고 경제개혁과 대외개방에 과감히 나서기 시작했다.
『진리를 검증하는 유일한 기준은 실천』이라고 하며 모택동의 교조주의를 부정한데 이어 「실천」대신「생산력」을 강조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이와 더불어 중국 지도부는『남북한의 현상유지를 바란다』는 표명으로써 북한의「하나의 조선 정책」에서 이탈하여 한국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교정하며 현실적인 접근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한국 관계 보도를 평양말로 맹목적으로 인용하던 관행이 소멸된 것도 이 시기부터였다.
80년대 중반 소련에서도「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개혁)가 시작되어 미중 데탕트는 미소 데탕트로 확산되었다.
이로써 한국 전쟁을 축으로 전쟁의 쌍방으로 나뉘었던 북한·중·소와 한국·미(일)의 북방 및 남방 3각 관계는 군사·정치적 이해구조에서 경제·무역의 교류관계로 질적인 재편에 들어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80년대의 남북 관계가 제2의 평화공존시대를 맞이하면서 새로운 접근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정세변화와 분리하여 생각하기 어렵다.
중소와 동구권을 포함하는 사회주의 권의 개혁 바람은 생산을 높이려는 경제적 동기에서 시작되었지만 한국과의 직접 교류 관계가 추진됨에 따라 정치적 현상타파의 영향을 발생시켰다. 반면 북한은「동지들」의 현실주의적 변신에서 오는 개방압력을 받는 수세로 몰리게 되었다.
생존을 위한 가열한 역정의 한 편으로 민주화를 위한 투쟁을 내연시켜 온 한국 사회는 이와 같은 내외의 변화물결에 힘입으며 냉전시대의 한 정식이었던 남북의 소모적 대립에서 전환하여 내부로부터 분단현상을 타파하려는 운동이 본격화되었다.
분단의 출발점에서 규정되었던 한미 관계로부터 한국의 자주성을 강조하는 새로운 주장들은 그의 경제적 성취와 민주화를 토대로 고무 받고 있다.
이제 한국은 더 이상「삶의 끝」이 아니다. 분단의 역풍 속에 태어난 한국이 전쟁의 철저한 파괴로부터 불과 한 세대를 지나지 않아 세계 제 10위의 공업 선진국에 진입한 것이다.
소련조차도『자본주의의 성공사례를 알리는 진열장』이라는 비판을 하면서도『한국을 배우자』는 제안을 공식적으로 제기하기에 이르렀다.
전후. 냉전 구조의 희생물로, 그리고 사실상 지구 최후의 냉전질서의 사각 지대였던 한반도는 이제 세계적 규모로 일어나고 있는 새로운 국제질서에 재 편입되고 있다.
이제 냉전질서의 마지막 청산은 남북한 자신의 손으로 옮겨지고 있다. 분단의 긴 터널을 빠져 나와 능동적인 역사의 주체로서 한반도 위에 자유와 통일을 위한 평화구조를 정착시킬 수 있느냐의 문제가 한민족에게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전택원 기자><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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