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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나전칠기 김봉용 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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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자개 일은 한국공예의 자랑이요, 긍지다. 긴 역사를 통하여 한국이 이룩해놓은 빛나는 미술의 한 중요한 부분이 나전칠기다. 조개껍질을 이용해 몸을 단장하고 기물을 치장하려는 생각은 원시 때부터 인류의 공통된 지혜였다고 하겠지만 그 중에도 전복껍질의 영롱함을 효용해 온 슬기야말로 동서고금을 통하여 따를 민족이 또 있을까.
나전칠기는 글자 그대로 옻칠에서 비롯된 독특한 공예다. 옻칠이 없는 구미에는 그 솜씨가 있을 수 없다. 옻칠은 동아시아의 일부 지역만이 가진 진귀한 도료이기 때문에 나전칠기라 하면 자연 칠 문화권의 자랑일 수밖에 없다.

<"돈벌 생각 못해봐">
옻칠이라 하면 물론 중국이 단연 앞섰고 다양하다. 땅덩이도 넓고 옻의 생산량이 여타 지역 것을 다 합쳐도 따를 수 없을 만큼 엄청나지만 그러나 자개에 관한 한 한국만은 못하다. 한국인의 자개에 대한 유별난 기호를 따르지 못하는 것이다.
사철 습기 많은 풍토의 일본이 또한 칠기를 끔찍하게 여기는 것은 저들의 생활용품엔 옻칠이 필수적인데 기인하지만 자개 다루는 솜씨에 있어서는 그리 능숙치 못하다. 아마 저들의 근시안적인 잔재주 취향에는 대범하게 자개를 다루게되는 것이 영 마음 내키지 않았는지 모른다. 그밖에 저질의 옻칠밖에 나지 않는 동남아지역은 거론할 여지조차 없다.
『그렇지요. 먹고살기 어려웠던 청소년 시절엔 자개 일이 퍽 유망할거라 해서 애써 배웠는데 평생 돈벌 생각은 못해 봤네요. 배운 일을 후회해본 적도 없구요. 자개는 다룰수록 그 빛깔에 흘려서 빠져들게 되거든요.』자기직업에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 예사로운 인간사이지만 작품 하는 재미로 살아왔다는 것이 공예계의 원로 김봉룡 옹(86세) 의 회고담이다.
중요무형문화재 제10호「나전 칠기장」지금 큰 작품에는 손 못 대지만 『일하니 기력이 유지된다』 면서 일손을 멈추지 않고 있다. 원주에 은거한 채 근래엔 나들이조차 별로 않는다. 어떤 점에선 김 옹은 돈 생각할 계제가 없었는지 모른다. 자개 일을 배운지 10년이 못돼 큰 상복에 묻히는 행운아였기 때문이다.
그것도 스승을 제쳐놓고 각광을 받았다. 그때가 개화기이긴 하지만 무 학의 시골 청년이 국제박람회에서 상을 받고 또 어엿한 작가생활을 하며 오히려 교육자의 입장에 서게 됐으니 더욱 그럴만하다. 지정된 기능보유자가운데 국전의 초대작가에 이른 것도 김 옹이 유일한 케이스.
김 옹은 본시 나전칠기의 고장 충무태생이다. 옛 통영이 언제부터 우리 나라를 대표하는 나전칠기의 고장으로 부상됐는지는 알 수 없지만 조선조 초만 하더라도 나 전장이 서울의 경 공장에만 보일 뿐 외 공장으로서는 나타나 있지 않다.
그러나 통영이 수군의 중요거점으로 확장되면서 각종기술과 산업이 발달됐을 것이고 급기야 18, 19세기의 기록에서는 유명 물산의 생산지로서 두드러진다. 더구나 일제의 침략이후 도립 공업전습소가 이 고장에 우선적으로 설치된 것도 나전칠기의 발전에 획기적인 계기가 됐다.

<천혜의 여건 갖춰>
워낙 통영 일원의 다도해는 녹색이 감도는 전복껍질의 1급 산지로 알려진 터다. 잔잔하고 맑은 바닷물 때문일까.
제주일대의 전복은 그에 버금간다고 예부터 일러왔다. 우리 나라는 아무 조개나 활용하는 이른바 후패 법이 발달되지 않은 나라다. 거기에다 한국은세계에서 가장 좋은 옻칠의 산지. 중국 산 옻 속에 우루시올(주성분)의 함유량이 60%에 불과하다면 한국산 옻칠. 속에는 70∼80%나 된다. 말하자면 천혜의 나전칠기 산지다운 요건을 갖추고 있는 셈이다.
『통영에선 집집마다 자개 일을 많이 했으니까 어려서부터 보긴 했어도 선대부터 해온 일은 아니지요. 어릴 때 영리하다고 불려간 것이 일본사람 집에서 애 봐주는 것이었군요. 그래 안되겠다 싶었는지 10세쯤부터 양태 (갓의 차양부분) 일을 수년간 배웠지요. 통영 갓·이라면 제일로 치던 시절이어서 대올을 가늘게 떠가지고 양태 겯는 일부터 배웠던 것인데 일인들이 들어오자 나전의 인기가 급상승하고 갓은 시속에 밀려나는 것이 훤히 보이더군요. 그땐 일본사람들이 자개 일은 영 못했으니까요 .』
갓 만드는 일도 그러하지만 나전칠기 역시 아주 분업화된 공정을 거치게 마련이다. 재주 없는 사람들은 전복껍질을 모아다가 숫돌로 갈아내 내피만 종잇장처럼 만드는 것을 생업으로 삼는다. 목물의 뼈대는 목수가 해오고, 가장 까다로운 솜씨는 종잇장 같은 자개를 오려서 무늬 놓아 둘 이는 나전장의작업이다. 그러면 칠장이 따로 있어 옻칠을 몇 번씩 올리면서 연마해 윤을 낸다.
김 옹이 처음 일 배우기 시작한 것은 나 전장 분야이고 현재는 칠장의 일까지 경하는 수밖에 없다. 이 분야의 종사자가 워낙 적어진데다가 작품제작이라는 미명아래 과거와 같은 공방의 협업체제가 무너져버린 것이다.
일제 전성기에 속하는 1920년대에 나전 제품은 물건이 없어 못 팔 지경이었다.
그래서 서울 양반들이 통영장인들을 불러 올려 여기저기에 간이공방을 차렸다. 물론 그런 공방들은 2∼3년을 견디는 것이 고작이었지만 그런 대로 나전장의 월급은 각각 솜씨 나름으로 점점 올랐고 그럴수록 벌기보다 쓰기에 바쁜 버릇이 장인들 사이에 은연중 생기기도 했다.

<22세 때부터 두각>
청년 김봉룡은 그런 시류를 타고 22세에 상경해 출세의 길을 나섰다. 그때 그를 발탁한사람은 전성규. 본시 누동궁 상노 출신인데 순검으로 있으면서 돈푼이나 모아 장전을 차리고 또 자개 공방도 마련해 스스로 그 기술을 익힌 사람이다. 그는 손재주가 좋아 자개 위에 살(선묘)을 잘 쳤고 눈썰미가 뛰어나 도안도 썩 잘했다.
김 옹은 한때 전성규를 따라 일본 고강 시의 칠공회사에 진출한 적이 있었다. 그 시절만 해도 일본이 외국의 기술이라면 다방면으로 도입할 때여서 그 곳 현장이 전씨에게 제의하기를 『연간 20명씩 기술자를 길러내 주면 3년에 3만원 주겠다』고 약속했다. 3만원이면 3백석 지기에 해당하는 금액인데『천년 예술을 3만원엔 안 말겠다』고 뿌리치고 일행이 모두 귀향했다. 그야말로 나전장의 대단한 자부심이었다.
한국의 나전칠기를 천년예술이라 일컫는 것은 것이 대체로 10세기 께부터 시작됐으리라 추정되기 때문이다. 근년에 경주 안압지에서 나온 평탈(금·은 판을 오려서 칠기에다 붙인 것)유물로 미루어 보아 통일신라 말기나 고려 초쯤에는 능히 나전으로 대체하는 기량이 생겼음직 하기 때문이다.
물론 10세기께의 나전칠기가 유물로서 입증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국내에는 단 한 점 없으면서 해외 여기저기에 산재하는 고려 성대의 나전 경함(두루마리 불경의 수장함)을 비롯해 염주합 이라든가 모자합(화장품 케이스) 등의 세련된 솜씨를 보더라도 그것이 오랜 세월동안 갈고 닦은 기량임을 충분히 알만하다.
그들 고려 때의 나전칠기에는 주요한 국화부분을 대모(투명한 거북 등 껍질)로 박으면서 그 안목에다 노랑이나 분홍의 복채를 입힌 것이 돋보이려니와 은·동 철사를 구부려 당초 줄기로 삼은 것도 한국 나전칠기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그런 전통은 조선시대로 내려오면서 미미하게나마 이어져 왔으며 귀족공예가 대중화과정을 밟는 양상도 현저히 드러나게 된다.

<상복에 묻혀 살아>
『박대통령이 호주와 뉴질랜드를 순방 할 때 나전칠기를 가지고 갔다가 자개가 떨어져버려 망신당할 뻔했던 사건이 있지 않습니까. 칠기를 잘 만들면야 갑자기 자개가 떨어지고 터지는 변이 생길 수 있나요? 오늘의 시점에서 재론하고 싶은 것이 바로 교육문제입니다.』
1968년의 일이므로 옻칠제품은 거의 없고 대용품으로서의 조잡한 캐슈칠이 극성 부릴 때의 얘기다. 값싼 캐슈칠의 범람은 유독 한국에서 성행된 전후 혼란기의 산물인데 그 여파는 사실 우리 사회에서 아직도 도도한 흐름으로 남아있다. 그 눈가림으로 말미암아 왜 옻칠이 좋은 것이고 값비싼 것인지 식별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김옹이 파리의 세계장식공예품박람회에 도태의 나전칠기 화병을 출품해 은상을 차지한 것은 1925년의 일이다. 선전에서 특선, 창덕궁상의 상금이 무려 1백원이었다. 그는 많은 상을 받았고 그의 공로에 대한 치하 속에 묻혀 살아왔다.
자기 공방을 기업화한 일이 없는 대신 지난 40년간은 자개가 무엇이며 옻칠이 무엇인가를 후진에게 가르쳐야겠다는 일념으로 교육자구실을 해왔다. 평북의 태천 칠공예 제작소에도 있었고 해방 후에는 통영에서 도립나전칠공예양성소의 실질적인 운영자노릇을 15년간 해왔다.68년이래 원주에서의 전수교육도 마찬가지다.
김옹의 지론은 지정된 보유자라고 해서 다 전수교육의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니 잖느냐는 데 요점이 있다. 사실 대부분의 기능보유자는 손끝 재주에 머무르고 있다. 그 단계를 벗어나려면 다른 나라들처럼 대학에 칠 공예 과가 설치돼야겠고 서울과 지방에 그 같은 향토공예를 지도 육성하는 기구와 요원이 뒷받침돼야 한다.
언뜻 요원한 얘기 같지만 당장 에라도 실현 가능한 것이요, 언젠가 그렇게 돼가야 할 선결과제의 하나다.

<글 이종석·중앙일보 호암 갤러리 관장 문화재전문위원 사진 임영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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