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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 시인 김용택 4년 만에 시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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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아뿔싸! 시가 짧아졌다!

내일 모레면 예순인 시인, 평생토록 섬진강물 바라보고 살더니 말이 없어졌다!

'그래, 알았어/그래, 그럴게/나도…… 응/그래' 겨우 열다섯 글자 적어놓고 '달'이라 부르더니만, '바람이 불면/내 가슴속에서는 풀피리 소리가 납니다' 달랑 두 줄 이어놓고 '그리움'이라 우긴다. 석 줄 늘어놓은 '사랑'이란 시는 두 문장이다. '밤길을 달리는데/자동차 불빛 속으로 벌레들이 날아와 유리창에 부딪쳐 죽는다//필사적이다'

섬진강 시인 김용택(58.사진)이 4년 만에 발표한 시집 '그래서 당신'(문학동네)은 놀랍다. 열일곱 글자나 서른한 글자의 세계인 일본의 하이쿠(俳句)나 와카(和歌)가 떠오르기도 하고, 툭 한 마디 던져놓고 휑하니 돌아서는 노승의 선시(禪詩)도 닮았다. 시력 25년이면 시가 말을 삼키나 보다.

그래도 낯설지는 않다. 시구마다 섬진강변 서성거리는 시인의 모습이 보인다. 집어 말하자면, 거기 쪼그리고 앉아 올망졸망한 봄꽃들 쳐다보는 시인의 뒷모습이 보인다. 그래, 이번 시집은 꽃 시집이다. 하나 예쁘기만 한 여느 꽃 시와 다르다. 김용택의 꽃은, 남도의 정한(情恨)을 받아먹고 피어난다.

'염병헌다 시방. 부끄럽지도 않냐 다 큰 것이 살을 다 내놓고 훤헌 대낮에 낮잠을 자다니/연분홍 살빛으로 뒤척이는 저 산골짜기/어지러워라 환장허것네/저 산 아래 내가 쓰려져불겄다 시방'

시 '봄날은 간다'에서 '진달래'라는 부분이다. 마구 퍼붓는 늙은 어미의 불호령이 되레 정겹다. 질펀한 욕설에 쟁인 애틋한 정이 만져져서다. 김용택의 꽃은 이렇듯, 섬진강물과 함께 떠내려간 누이의 기억과 치욕스런 오늘에도 솟아나는 삶의 희망을 이른다. 시인은 말했다. "그때 나를 찾아왔던 나비와 매화, 그리고 봄바람, 나는 이들에게 늘 '그래서 당신'이고 싶다"고. 시인은 또 말했다. '외로움이 쇠어/지붕에 흰 서리 내리고/매화는 피데'('남쪽'부분)라고 쓰고 기뻤다고. 다시 읽어보니, 시는 짧지 않더라. 행과 연 사이의 여백, 참으로 길고 수다스럽더라.

손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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