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야근하면 내일은 점심먹고 퇴근” … 유연근무제 확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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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삼성전자가 오는 7월부터 선택적 근로시간제와 재량근로제를 실시한다고 밝혔다. 사진은 수원시 영통구 삼성디지털시티에 직원들이 출근하는 모습. [연합뉴스]

삼성전자가 오는 7월부터 선택적 근로시간제와 재량근로제를 실시한다고 밝혔다. 사진은 수원시 영통구 삼성디지털시티에 직원들이 출근하는 모습. [연합뉴스]

삼성전자가 연구개발(R&D) 인력을 대상으로 근로 시간을 자유롭게 정할 수 있는 ‘재량근무제’를 도입한다. 미국 실리콘밸리에서처럼 근로자들에게 일하는 시간·방식·장소 등을 전적으로 맡기는 근무 형태다. 삼성전자는 또 1개월 단위로 근무시간을 알아서 조정하는 ‘선택적 근로시간제’도 함께 시행한다. 이렇게 되면 직원들은 일별·주별로 유연하게 근무시간을 조절하면서 한 달 동안 정해진 총 근무시간만 맞춰 일하면 된다.

‘주52시간’ 앞둔 기업들 대책 내놔 #삼성전자 사무직·연구개발 인력 #월단위로 근로시간 알아서 조정 #한화케미칼 선택적 근로제 실시 #2주 단위 최대 8시간 자율 근무

삼성전자는 이런 내용의 ‘유연근무제’를 시행한다고 29일 밝혔다. 다음 달부터 300인 이상 사업장을 시작으로 ‘주 52시간 근무제’가 단계적으로 도입되는데 따른 대책이다. 삼성전자는 “일할 때 일하고, 쉴 때 쉬는 효율적인 근무 문화를 조성해 글로벌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한 취지”라고 도입 배경을 밝혔다.

삼성전자가 이번에 도입하기로 한 이른바 ‘플렉스타임(flex time)제’라고 불리는 선택적 근로시간제는 주 40시간이 아닌 월평균 주 40시간 이내에서 직원들이 출퇴근과 근무시간을 자유롭게 조정할 수 있다. 예컨대 한 달 근무 일수가 25일이라면 한 달 총 200시간(25일×8시간) 내에서 근로자가 자율적으로 업무량에 따라 일할 시간을 정하면 된다. 다만 ‘주 단위’로 최소 20시간 근무시간은 채워야 한다. 이 근무제도는 연구개발과 사무직이 대상이다.

반도체 등 중요 프로젝트 연구개발(R&D)에 참여하는 핵심 인력에 한해서는 주 52시간제 적용을 피할 수 있는 ‘재량근로제’를 도입하기로 했다. 이는 디자이너·연구개발자 등 법이 정한 직군에 한해 실제 근로시간과 상관없이 노사가 사전에 합의한 시간만큼 일한 것으로 간주하는 제도다. 이는 직원에게 근로시간 관리에 대한 완전한 자율권을 부여하는 것이다. ‘주 단위’ 최소 20시간 근무시간을 채우지 않아도 되고, 직원이 자신의 성과를 극대화할 수 있도록 알아서 일하면 된다.

이에 앞서 삼성전자는 지난 1월부터 비(非) 업무시간을 엄격히 근로시간에서 제외하는 형태의 새로운 근로 시스템을 도입한 바 있다. 예컨대 점심시간이나 피트니스 이용과 같은 업무와 무관한 개인적 볼 일 등은 철저하게 근무 시간에서 빼는 식이다. 근로 시간은 직원이 출입증을 찍는 시간을 기준으로 체크한다. 삼성은 그간 시범 운영을 통해 나타난 문제점을 보완해 이런 ‘유연근무제’를 시행하기로 한 것으로 풀이된다.

다양해지는 유연 근무 제도

다양해지는 유연 근무 제도

삼성전자는 또 정부의 ‘포괄 임금제 원칙적 폐지’ 방침에 맞춰 포괄 임금에 해당하던 시간 외 수당을 별도 지급하는 방안을 마련하기로 했다. 그간 월급에 뭉뚱그려 줬던 각종 초과 근로수당을 엄격히 관리해 주겠다는 것이다. 예컨대 시간 외 근무가 월 20시간을 넘으면 10분 단위로 통상임금의 150%를 지급하고, 밤 10시 이후 심야 근무 시에는 통상임금의 200%를 지급한다.

삼성전자의 새 근무시스템은 재계 전반으로 확산할 것으로 예상한다. 삼성전자가 근무 효율성을 높인다는 취지에서 2009년 도입한 ‘자율출근제’ 등을 다른 대기업들이 뒤따랐기 때문이다.

이날 한화케미칼도 근무 시간을 스스로 조절할 수 있는 ‘인타임 패키지(In Time Package)’를 시행한다고 밝혔다. 6월까지 시범운영을 거쳐 7월부터 정식 실시할 예정이다.

한화케미칼 근로자들은 지금까지 통상 아침 8시부터 오후 5시 30분까지 근무했다. 점심시간(1시간 30분)을 제외한 하루 근로시간은 8시간이었다. 하지만 인타임 패키지의 일환인 ‘탄력 근무제’에 따라 앞으로는 2주 단위로 최대 8시간 범위에서 근무시간 조절이 가능하다.

예컨대 이번 주 금요일 오후에 여행을 떠나고 싶다면, 이번 주나 다음 주 월~목요일에 4시간 야근하면 된다. 초과근무 시간만큼 일찍 퇴근할 수 있어서다. 이럴 경우 금요일 오후 1시 30분에 퇴근이 가능하다.

아침에 아이들을 등·하교시켜야 하는 맞벌이 부부에게 유리한 제도도 있다. ‘시차 출퇴근제’는 출근 시간(오전 7시~10시)을 자율적으로 선택하는 제도다. 자녀를 등교시키고 출근할 경우 출근 시간을 늦추는 대신 그만큼 늦게 퇴근하면 된다. 반대로 자녀를 하교시켜야 할 경우 출근을 일찍하면 일찍 퇴근할 수 있다. 출근 시간은 한 달 기준으로 변경할 수 있고, 요일별로 다르게 정할 수도 있다. 예컨대 월·수·금은 오전 8시, 화·목은 오전 9시 30분에 출근할 수 있다.

한화케미칼은 “정부가 추진하는 근로시간 단축제도 시행을 앞두고 직원들의 일과 삶의 균형을 보장하기 위해 선제적으로 재량 근로를 시행하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현대·기아차도 이달 초부터 선택적 근로시간제 등에 기반을 둔 유연근무제 시범 운영에 들어갔다. 대상은 일반직(사무직)과 연구직(남양연구소 등) 직원이다.

하지만 이런 대책으로 주당 52시간 근로 시행에 따른 부작용을 말끔히 해결할 수 없다는 게 문제다. 신제품이나 계절을 타는 가전의 생산공장은 3~6개월 동안 집중적으로 가동해야 해 업무에 과부하가 걸린다. 사무직과 달리 생산 현장에서 주 52시간을 맞춰 일했다간 수요를 맞추기가 쉽지 않다.

이에 삼성전자는 에어컨 성수기 등에 대비, 제조 부문 생산직에 대해서는 ‘3개월 탄력적 근로시간제’를 도입하기로 했다. 3개월 단위로 특정일의 노동시간을 늘리면 다른 날은 단축해 평균 근무시간을 최대 주 52시간으로 맞추는 제도다. 하지만 유럽·일본 등 주요 국가는 최대 1년 단위로 탄력적 근로시간제가 운영되는데, 3개월은 너무 짧다는 반응이 나온다. 특히 노사 간 서면 합의 없이 ‘취업 규칙’으로 정할 경우 이 단위 기한이 2주 이내로 제한된다.

한 재계 관계자는 “3개월 단위로 주당 52시간을 맞추게 돼 있는 탄력적 근로시간제의 단위 시간을 1년까지 늘려 달라고 줄기차게 건의해왔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며 “기업들이 자구책 마련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고 전했다.

손해용·문희철·하선영 기자 sohn.y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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