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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의 시뮬라크르는 아름다운가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584호 29면

테크놀로지와 예술

극도의 시뮬라크르 세상에 적응이 쉽지 않다. AI에 언제 일자리를 뺏길지 모르고, VR· AR을 넘어 맨눈 앞에 가상과 실재가 혼합되는 MR이란 기술까지 나왔다니,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게임인지 모를 불확실한 세계에서 나란 존재는 뭔가. 기술발전의 끝에는 대체 뭐가 있을까. 시즌4까지 나온 화제의 영드 ‘블랙미러’의 인기는 인간의 이런 보편적인 공포심을 반영한다. 죽은 사람이 남긴 데이터를 모아 AI로봇으로 부활시키고, MR게임을 위해 게이머의 뇌신경에 직접 연결된 AI 칩이 게이머의 지각 자체를 바꿔버리는 등, 지금의 기술이 윤리적 규제 없이 발전했을 때 충분히 가능한 근미래 디스토피아의 모습이 꽤나 충격적이다.

예술분야도 다르지 않다. AI가 작곡한 음악에 사람이 감동받고, AI가 쓴 소설에 사람이 상을 준다니 예술가들도 경계할 수 밖에. 하지만 이런 세상을 한발 앞서 통찰해야 하는 것도 예술가의 의무다. 현대무용가 신창호가 국립무용단의 ‘맨메이드’를 통해 “로봇이 창작한 무용이 아름다울까?”라는 질문을 던진 이유다. 그는 한국춤이라는 주재료에 미디어아트와 디지털음악, VR기어까지 동원해 인간과 인공, 가상과 실재가 혼합된 무대를 제시하며 객석을 사유의 공간으로 만들었다.

AI가 움직임의 기본 단위를 ‘픽셀’로 놓고 24인 무용수를 각각의 픽셀로 인식해 안무를 짠다는 컨셉트다. 3D프린터 같은 안무기계에 한국춤을 재료로 넣고 ‘신창호 스타일’ 버튼을 누르면, 이제 AI가 작동할 시간. AI는 한국무용의 기본 동작인 ‘다듬새’로 시작해 한국무용의 틀에서 상상하기 힘든 파격적 동작들로 무용수들의 능력치를 끌어올리며 ‘오류와 진화’라는 테마를 가진 거대한 작품을 완성해 간다. 클라이맥스는 VR기어를 쓴 무용수와 싱크로되는 또 다른 무용수의 2인무다. VR게임 속에 들어온 듯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의 경계가 흐려질 때, 질문이 던져진다. 인간을 복제한 존재가 만든 춤을 인간이 춘다면, 누가 누구를 제어하는 것인가.

자연스럽게 지난해 내한한 웨인 맥그리거의 ‘아토모스’가 떠올랐다. 맥그리거는 안무과정에 첨단기술을 활용하는 것으로 유명한 영국의 젊은 거장이다. 무용수들의 생체 정보를 반영한 AI 프로그램으로 가동되는 ‘디지털 댄서’의 기발한 움직임을 무용수들이 습득해 고정된 안무 패턴을 벗어난 새로운 안무언어를 추구한다. ‘아토모스’는 인간과 사이보그의 경계에서 인간성에 대해 묻는 영화 ‘블레이드 러너’를 서브텍스트로 깔고, 기술을 통한 인간성의 확장을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디지털 댄서’에게 현실의 무용수가 움직임을 배웠지만 디지털 댄서를 만든 건 인간이기에, 이 모든 것이 결국 예술이라는 얘기였다.

그렇다면 이런 예술은 과연 아름다운가. 신창호가 AI 로봇에 빙의해 만든 안무는 인간과 인공의 경계는 물론 한국무용과 현대무용의 경계까지 허물었다. 빠르고 기계적인 움직임 속에 3배속으로 돌린 듯한 한국무용 춤사위가 돌출하는 압도적인 군무가 강한 인상을 남겼다. 신창호 스타일의 절도있는 에너지와 국립무용단의 한국적 아우라가 서로의 가능성을 확장한 셈이다. 기술이란 키워드를 촉매삼은 한국무용과 현대무용의 이종교배 실험 결과물이 이정도라면, 기술이 예술까지 풍요롭게 하리라는 긍정적 기대감을 가져도 좋지 않을까.

글 유주현 객원기자 yjj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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