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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발레는 새로운 관객과 함께 만들어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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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4호 24면

발레 ‘헨젤과 그레텔’ 안무가 크리스토퍼 햄슨

클래식 음악과 옛이야기를 재료 삼는 전막 발레는 아름다운 춤이 최우선이지만, 그래도 스토리가 현대인의 눈높이에 맞지 않으면 영 찜찜하다. 26년만에 내한하는 스코틀랜드 국립발레단의 ‘헨젤과 그레텔’(5월23~27일 LG아트센터)이 그림동화를 파격적으로 재해석한 이유다. 가난한 부모에게 버려지는 대신 사라진 친구들을 찾아 제 발로 숲으로 떠난 남매의 모험 활극은 스코틀랜드 지역민들이 스스로 발전시킨 이야기다.

2012년부터 스코틀랜드 국립발레단을 이끈 안무가 크리스토퍼 햄슨(44)은 예술감독으로서 첫 안무작 ‘헨젤과 그레텔’을 관객과 함께 개발하며 새로운 시대의 관객에게 바짝 다가섰다. 뿐만아니라 이 발레단은 다양한 스타일의 공연은 물론, 세대를 아우르는 예술교육 활동과 소셜 미디어 채널을 통한 친밀한 마케팅 방식으로 전세계 관객에게 어필하고 있다. 최근엔 영국 씨어터 어워즈(2017) 무용 부문 작품상과 마케팅·관객개발상을 수상했다. 고급 예술로서의 문턱을 낮추고 무대를 초월한 발레의 영향력을 확장한다는 뚜렷한 비전을 가진 젊은 예술감독을 e메일로 만났다.

크리스토퍼 햄슨

크리스토퍼 햄슨

마을에서 아이들이 하나 둘씩 사라진다. 결국 헨젤과 그레텔만이 남게 되자 부모는 남매를 집안에 가둔다.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던 남매는 몰래 집을 빠져 나와 사라진 친구들을 찾아 나서고, 마법의 숲에 들어서며 긴장감 넘치는 모험이 펼쳐진다.

스코틀랜드 국립발레단의 ‘헨젤과 그레텔’은 감칠맛 나는 각색과 화려한 의상, 드라마틱한 음악과 감각적인 무대미술로 오래된 이야기를 완전히 새롭게 탈바꿈시켰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롤리팝, 반짝반짝 흩날리는 별모래, 달콤함이 풍기는 듯한 과자집 등으로 채워지는 무대는 매순간 관객을 매혹시킨다.

“젊은 관객들을 위한 새로운 이야기를 찾다가 오페라를 통해 ‘헨젤과 그레텔’을 재발견하게 됐다”는 크리스토퍼 햄슨은 “원작은 잘 알려진 이야기지만 전개가 느리고, 부모가 아이들을 숲속에 방치하는 굉장히 암울한 내용이다. 새로운 버전을 작업하면서 나는 헨젤과 그레텔이 더욱 모험심이 강했으면 했고, 부모는 아이들을 사랑하면서도 자상한 모습이기를 바랐다”고 했다.

지역 주민들의 아이디어가 작품에 반영됐다던데.
“스코틀랜드 전역에서 ‘헨젤과 그레텔, 그리고 나 (Hansel and Gretel, & Me)’라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헨젤과 그레텔’을 테마로 책, 그림, 스토리텔링, 무용에 걸쳐 모든 연령대의 사람들이 참가할 수 있는 프로젝트였다. 워크숍을 통해 반복적으로 제시되는 아이디어나 흥미로운 관점들을 포착할 수 있었고, 새로운 스토리를 만드는 데 참고했다. 숲속 까마귀도 그중 하나다. 사람들이 까마귀를 숲에 사는 악의 세력으로 여기길래, 이들을 마녀의 수하로 설정하기로 했다.”
제작 과정 개입이 일반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프로젝트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이 이 이야기가 자신들에게 의미하는 바를 가까이 느끼게 됐을 거다. 이야기 속의 도덕적 가치관이나 메시지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보게 하는 계기를 제공했다고 생각한다.”
 ⓒ Andy Ross

ⓒ Andy Ross

내한공연에선 우리 국립발레단 부설 아카데미생들이 무대에 오른다.
“우리는 어린이들과 함께 작업하는데 아주 익숙하다. 어린 무용수들을 예술작업에 참여시키는 것은 즐겁고 중요한 일이다. 그들 모두가 무용수가 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작품을 만드는데 들어가는 힘든 작업과 헌신, 그리고 열정의 가치에 대해 제대로 인식할 수 있게 될 테니까.”

그는 그림동화 원전과 가장 큰 차이점을 “시작부터 등장하는 마녀 캐릭터”라고 했다. 마녀 역의 무용수는 아이들의 선생님으로 등장해 달의 요정 등 여러 가지 모습으로 변하며 아이들을 유혹한다. “원작에서는 부모가 집에 먹을 것이 떨어지자 아이들을 숲에 내다버리기로 계획하고, 몇몇 버전에서는 아이들을 죽이려고까지 한다. 그러면 이야기의 끝에 아이들이 부모님과 다시 만나 해결에 다다를 여지가 없어진다. 그런 가족에게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을 테니까. 대신 학교에 새로 온 선생님이 아이들을 하나 둘씩 데리고 가는 것으로 설정했다.”

아이들 보다 마녀가 주인공 같다.  
“맞다. 마녀가 전체 이야기의 절대적인 중심을 차지한다. 마녀가 여러 모습으로 변장을 하고 아이들을 꾀어내어 가족들과 헤어지도록 만들게 설정했다. 선생님으로 변장한 마녀가 아이들에게 최면을 걸고, 거리에서는 헨젤과 그레텔을 롤리팝으로 유혹하고, 마법의 숲에서는 엄청난 규모의 파티를 열어서 이들에게 잠이 쏟아지게 만든다. 헨젤과 그레텔은 화려한 외관의 과자로 만든 집에 들어간 후에야 그녀가 정말로 누구인지를 알게 된다.”  

한국 국립발레단 부설 아카데미생들과도 호흡

스코틀랜드 국립발레단은 무용가들만을 위한 단체는 아니다. 어린이와 일반인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은 물론, 파킨슨환자를 위한 무용교실, 특수학교 학생들을 위한 프로그램 등 예술을 통해 지역사회에 공헌하는 프로그램을 비중있게 운영하고 있다. 이런 방향성은 요즘 선진국 예술단체들의 트렌드이기도 하다.

ⓒ Andy Ross

ⓒ Andy Ross

발레단에 파킨슨 환자를 위한 프로그램이 있던데.
“미국의 마크 모리스 댄스그룹이 개발한 ‘댄스 포 피디(Dance for Parkinson’s Disease)에서 영감받았다. 우리 프로그램은 파킨슨병으로 인한 신체적, 정신적 증상들을 케어하고 있다. 환자들의 움직임과 관련된 조정력, 유연성, 걸음걸이, 균형잡기, 자아표현 등이 실제로 개선되고 있다. 스코틀랜드 왕립예술원의 베다니 화이트사이드 박사가 우리 프로그램의 영향을 상세하게 다룬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현재 글래스고와 에든버러에서 주 3회 클래스를 진행하고 있는데, 최근 폴 햄린 재단에서 후원을 받아 여기저기서 주 5회씩 진행하는 클래스가 개설되고 있다.”

정서적으로 불안정한 청소년을 위한 ‘The Close’ 프로그램도 있다. 참가자들은 1주일간 극장에 VIP게스트로 초청되어 무용·음악 창작 워크샵에 참여하면서 실제 발레단의 공연 레퍼토리를 소재로 자신들이 발견한 주제와 테마를 탐구하고, 예술감독을 비롯한 무용수들과 대화를 나누며 창조적인 경험의 기회를 제공받는다. 매튜 본이 안무한 발레단의 레퍼토리 ‘하일랜드 플링’의 경우 현재 스코틀랜드 하일랜드와 북부의 도서 지방에까지 투어 공연이 이어지고 있는데, 투어를 돌면서 총 7개 팀이 이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무용가와 뮤지션들로 구성된 소규모 그룹이 창작 워크숍, 발레 클래스, 대담 등을 이끌고 있다. 전문가들이 참가자들의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받아들여 신뢰감을 주면서 무용이나 음악, 시각예술 분야에 대한 기량을 쌓도록 도움을 주는 거다. 예술교육을 넘어 자신감이나 자아표현 등 장기적인 차원의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본다.”

그는 이런 지역사회 기반의 참여 프로그램을 발레단의 모든 활동의 중심에 두고 있다고 했다. ‘무대에서 그리고 무대를 초월해서 영감을 불어넣는 것’이 발레단의 미션이란 것이다. “우리는 공연을 통해서 보여지는 우리의 작품들이 지역사회뿐만 아니라 스코틀랜드와 해외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작품 제작을 결정할 때 나는 참여 프로그램 담당자를 포함시켜 해당 팀이 즉시 업무를 개시할 수 있도록 한다. 그러면 해당 작품과 관련된 아이디어와 테마들을 충분히 활용할 수 있게 되니 유의미한 참여 프로그램 개발로 이어진다.”

글 유주현 객원기자 yjjoo@joongang.co.kr 사진 LG아트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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