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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물차 45만대, 전용휴게소 50곳 … 핸들 잡은 채 꾸벅꾸벅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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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4호 10면

화물차 기사 쉴 곳이 없다

21년차 화물자동차 운전기사인 김민혁(가명·51)씨는 최근 아찔한 경험을 했다. 오전 2시쯤 전북 군산에서 화물을 싣고 출발해, 경기도 시흥시를 목표로 향해 가던 중이었다. 운전을 시작한 지 2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경기도 평택시에 다다랐다. 갑작스레 눈꺼풀이 무거워짐을 느낀 그는 갓길에 차를 세워두고 잠을 청했다. 하지만 잠이 채 들기도 전에 파열음이 났다. 승용차가 그의 화물차 측면을 들이받고 100m 더 진행하다 멈춰선 것. 다행히 승용차 운전자도 크게 다치진 않았지만, 김씨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 그는 “홍성 휴게소에 화물차 운전자들이 쉴 수 있는 공간이 있긴 하지만 사람들이 많아 잘 가지 않게 된다”며 “화물차 운전자들이 마음 편히 차를 대놓고 쉴 수 있는 공간이 더 많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기사들 갓길 쪽잠, 졸음 운전 일쑤 #야간에 아찔한 추돌 끊이지 않아 #사고 나면 치사율 승용차의 4배 #‘4시간 운행한 뒤 30분 휴식’ 규정 #쉼터 등 여건 미비로 실효성 없어 #대형 물류시설 휴게소 의무화를

정부 대책 잇따라 내놓지만 현실에 안 맞아

전국의 화물자동차 등록 대수는 45만대에 육박한다. 하지만 이들이 쉴 수 있는 공간이 부족하다. 국토교통부와 화물차 업계에 따르면 전국에는 총 50곳의 화물차 휴게시설(화물자동차 휴게소+공영차고지)이 있다. 화물자동차 휴게소는 법령에 따라 수면과 샤워시설 등 편의시설을 갖춘 곳이고 공영차고지는 주차장은 갖추고 있지만 화물차 휴게소보다 편의시설 수준이 떨어지는 게 일반적이다. 두 곳을 합친 주차면수는 1만3105개(2017년 말 기준)에 그친다. 때문에 화물차 운전자 중 상당수가 김씨처럼 도로 갓길 등에 차를 세워놓고 휴식을 취하거나, 어쩔 수 없이 졸음운전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차를 세워놓고 쉴 공간이 부족하다보니 화물차 운전자들은 달리는 시한폭탄 취급을 받는다. 경찰청에 따르면 2016년에만 2만6620건의 화물차 교통사고가 발생했다. 하루 평균 73건이다. 화물차 관련 교통사고는 그 속성상 대형사고의 우려도 크다. 국토교통부 분석 결과 고속도로에서 화물차 사고의 치사율은 12.6%(2016년 기준)에 달한다. 승용차 사고 치사율(3.6%)의 3.5배다.

쉴 곳이 마땅치 않으니 김씨처럼 고속도로 갓길 등에 차를 대놓고 잠을 청하는 화물차 기사도 많다. 국토교통부의 2016년 ‘화물자동차 휴게시설 이용자 만족도 및 조사 결과’에 따르면 전체 응답자(305명) 중 8.5%가 “도로변에 화물차를 주차해 놓는다”고 답했다. 이로 인한 야간 추돌사고도 끊이지 않는 형편이다. 게다가 삼성교통안전문화연구소는 지난해 11월 밤중에 (주차된) 화물차를 들이받았을 때의 치사율은 승용차를 추돌했을 때보다 22배 가량 높다는 분석 결과를 내놓은 바 있다. 그에 따르면 화물차가 피해 차량인 교통사고는 전체 교통사고 건수의 11%, 사망자 수의 38%를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물론 정부도 이런 문제를 인식하고 화물차 관련 사고를 줄이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우선 화물차에 운행기록장치와 속도제한장치를 달고, 화물차 운전자의 4시간 운행 후 30분 휴식을 의무화했다. 여기에 밤샘주차(박차) 단속을 강화했다. 하지만 그 실효성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의견이 다수다. 우선 화물차 운전자 휴식 강제 조치는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다. 국토교통부 조사 결과 한 달에 21일씩, 하루 평균 400㎞ 이상을 주행하며 하루 한두 차례 휴식을 취하는 화물차 운전자들의 현실과는 거리가 있다. 불법 밤샘주차 단속 역시 문제 해결보다는 화물차 운전자들의 부담만 늘리고 있다는 불만이 크다. 한 예로 2016년에만 전국적으로 총 4만5432건의 불법 밤샘주차가 적발돼 이 중 1만4257건에 대해 과징금이 부과됐다. 과징금 부과 총액은 24억 8382만원에 이른다. 단속을 피하려다보니 화물차 운전자들은 더 어두운 곳으로 숨어드는 경우도 많다. 국회입법조사처 강재구 입법조사관은 지난 2월 관련 보고서를 통해 “대규모 화물운송 수요 발생지인 공단이나 항만, 고속도로 인터체인지 주변 도로의 경우 화물 하역 시간대와 고속도로 통행요금 할인 시간 대에 맞추기 위한 불법 주정차 현상이 심각하다”고 지적했다.

해결책은 역시 화물차 운전자들이 안심하고 쉴 수 있는 공간을 더 많이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화물차 운전자들의 피로감을 덜어주는 동시에 화물차의 불법 주정차나 졸음운전으로 인한 일반 운전자들의 교통사고 피해를 줄일 수 있다. 화물차 휴게시설을 늘려야 한다는 데 대해선 부처 간에도 별 이견이 없다. 주무부처인 국토교통부도 2014년 말 ‘화물자동차 휴게시설 확충 종합계획’을 내놓고 “2019년까지 화물차 휴게소 13곳과 11개 시도에 공영차고지 21개소를 건설하겠다”고 발표했다. 문제는 이런 청사진이 제대로 실행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우선 화물차 휴게시설 설치에 대한 인근 지역 주민의 거부감이 만만치 않고, 지가 상승 등으로 인해 적당한 부지를 구하기 어려운 형편이다.

휴게소 신설, 땅값·님비에 막혀 지지부진

실제 충남 서산과 당진 등은 지가상승 등으로 인해 화물자동차 휴게소 건립이 사실상 어렵다. 강원도 원주에서는 화물차 공영차고지를 지으려다 주민들이 반대해 진통을 겪었다. 경기도 안산이나 평택휴게소 역시 사업 진행이 지지부진하다. 경남 김해시에선 화물자동차 휴게소를 지으려던 부지가 생태자연도 1등급 지역으로 지정되면서 대체부지를 찾느라 어려움을 겪었다. 당초 21개소를 지으려던 공영차고지의 경우 현재까지 사업이 마무리되거나 추진 중인 곳은 8곳에 불과하다. 나머지 13곳은 취소 또는 보류됐다. 2014년 정부가 화물차 휴게시설과 관련한 국고보조를 줄인 일도 독이 됐다. 과거에는 화물차 휴게소를 지을 땐 총 사업비의 30%를 정부가 보조해 줬었지만 현재는 민간투자 부분을 제외한 금액의 30%만을 지원하는 방향으로 변경됐다. 화물자동차 휴게소보다 시설 수준이 낮은 공영차고지도 과거 총 사업비의 90%까지 지원해주던 것을 현재는 최대 70%까지만 지원해주고 있다. 국회 국토교통위 윤영일 의원(민주평화당)은 “최근 대형 화물차 운전자의 열악한 근무 여건으로 인한 사회적 문제들이 대두되고 있지만, 이들을 위한 휴게시설 확보는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며 “물류단지나 항만 같은 대단위 물류시설을 개발할 때 화물차 휴게시설 설치를 의무화하고, 현재 공영차고지만 지을 수 있도록 한 개발제한구역 내에 시설이 더 나은 화물차 휴게소가 들어설 수 있도록 과감히 규제를 풀어줘야 한다”고 말했다.

이수기 기자 lee.sook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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