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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CoverStory] 그 하이마트 말고 다른 하이마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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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김수억씨가 대구 시내 중심가에 '하이마트(Heimat)'란 이름으로 고전음악 감상실을 연 것은 1957년. 초등학생이었던 그에게 어느 날 아버지가 물었다. "순희야, 우리 빵집을 차릴까 아니면 음악감상실을 할까?" 따끈한 단팥빵을 떠올리며 "빵집이오"라고 대답하는 그에게 아버지는 꿀밤을 한 대 먹이셨다. "이 녀석아, 빵은 육신의 양식이지만 음악은 영혼의 양식이다. 사람은 빵만으로는 살 수 없는 거란다." 입을 쑥 내밀고 아픈 머리를 문지르며 "그래도 빵집이 더 좋은데"하고 중얼거렸던 기억.

아버지의 음악 사랑은 각별했다. 클래식 음반이 귀하던 1950~60년대, 여윳돈만 생기면 갖고 싶은 음반 목록을 작성해 미국에 있는 이모에게 보냈다. 안면이 있는 미군부대 장교들을 통해 소포를 전해 받은 날이면 아버지는 종일 들떠 보였다. 조심스레 포장을 뜯고 새 음반에 입을 맞추며 즐거워했다. 한국전쟁 때 서울에서 대구로 피란온 세 식구가 결국 대구에 정착하게 된 것도 음반 때문이었다. 1000여 장의 음반이 트럭이나 기차의 거친 움직임에 깨지는 위험을 무릅쓰느니 상경을 포기하는 편이 나았던 것이다. 하루 내내 음악과 함께하고 싶어 결국 고전음악 감상실을 냈다. 대구극장 인근에 터를 잡고 '하이마트'란 이름으로 간판을 올렸다. 독일어로 '고향'이란 뜻이라고 설명하며 아버지는 빙그레 웃었다.

유리로 둘러싸인 전축실에 들어가는 것은 순희씨에게만 허락됐다. 아버지는 감상실에 DJ를 두는 당시의 유행을 따르지 않았다. 담배를 물고 건들거리는 젊은이에게 귀한 음반들을 맡길 수 없다는 이유였다. 중.고등학교 시절 순희씨는 수업이 끝나기가 무섭게 하이마트로 향했다. 아버지가 손님들의 신청곡을 정리해 그날의 프로그램을 만들면, 그는 흑판에 감상 목록을 적고 순서대로 음반을 찾아 턴테이블 옆에 쌓아두는 역할을 맡았다. 워낙 손님도 많고 음반도 많아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두 차례만 되풀이해도 등줄기에 땀이 흘렀다. 주말이나 공휴일도 예외는 없었다. 아버지는 그에게 항상 빳빳하게 풀먹인 교복을 입고 하이마트를 지키게 했다. 걸레를 빨아 감상실 구석구석을 청소하며 "다른 집에선 외동딸을 금이야, 옥이야 귀하게 키운다는데 나는 이게 뭐람"하고 혼자 투덜거리기도 했다.

단골손님이 그려준 아버지 김수억씨의 초상화. 생전에 제대로 찍은 사진 한 장 없어 이 펜화로 영정을 대신했다.

40~50년 묵은 LP재킷이 빼곡한 전축실.

정기적으로 찾아와 주는 클래식감상동호회.

순희씨가 분필로 눌러 쓴 감상곡 목록.

응급실에서 사경을 헤매던 아버지의 상태가 조금 호전된 듯했던 아침, 죽그릇을 챙기는 그에게 아버지는 "집으로 가지 말고 하이마트부터 살펴라"고 말했다. 부슬부슬 내리는 비를 맞으며 대구 시내를 걸어 감상실에 도착했다. 젖은 몸을 닦고 문을 열 준비를 하는데 전화가 걸려왔다. "빨리 병원으로 오렴. 늦으면 아버지께 마지막 인사 못 드린다." 어머니의 목소리가 떨렸다. 전날 밤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하이마트가 걱정인데 당신이 맡아주겠소?"하고 물었다. 감상실 걱정보다 어서 털고 일어날 생각이나 하라는 어머니의 대답에 아버지는 힘없이 웃었다. 순희씨는 저도 모르게 말했다. "아버지, 제가 있잖아요. 이제 하이마트 저 혼자서도 꾸려갈 수 있는 걸요. 걱정 마세요." 힘겹게 팔을 벌린 아버지는 그를 품에 안고 한참을 흐느꼈다. "잘 부탁한다"던 말씀이 유언이 될 줄은 몰랐다. 그가 병원에 도착하고 얼마 되지 않아 아버지는 숨을 거뒀다.

오후 1시를 훌쩍 넘겼는데 아직 감상실은 비어 있다. 휴게실에 손님용 원두커피를 내려두고, 순희씨는 쇼팽으로 음악을 바꾼다. '야상곡 op9-2'는 이런 때 어울린다. 나른한 오후, 홀로 앉아 조용히 듣기에 제격이다. 1960~70년대에 하이마트는 대구의 문화 아지트였다. 50평 남짓한 공간에 하루 400여 명이 드나들었다. 순희씨와 아버지 외에 9명의 종업원이 필요했고, 유난히 붐비는 날이면 경찰이 가게 앞에서 손님들을 줄 세워야 할 정도였다. 장발의 청년들이 의자 사이사이에 신문지를 깔고 쭈그리고 앉아 음악을 들었다. 청춘남녀의 데이트 코스였고, 김춘수.신동집 등 대구 출신 시인들이 모임을 열던 곳이었다.

눈에 띄게 손님이 줄어든 것은 80년대로 접어들면서부터. 전축과 카세트테이프가 대중화되고, 주변의 다른 음악감상실에서는 클래식보다 팝과 가요로 손님들의 입맛을 맞췄다. 인근에서 대구 지하철 공사가 시작되고 공사장을 지나기 힘들다는 손님들의 불평이 나오자 이전을 결심했다. 83년 새 상권의 중심지인 공평동에 다시 문을 열었지만, 끊어졌던 발길이 이어지지는 않았다. 몇 년 전부터는 손님 한 명 없이 순희씨 혼자 감상실 문을 여닫는 날이 적잖다. "가전제품 판매점 아니냐"고 묻는 전화를 받을 때마다 '음악감상실 하이마트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가고 있구나' 싶어 마음 한구석이 허전해진다.

비디오방이나 레스토랑으로 업종을 바꾸라는 권유가 많았다. 한때는 남편과 자식들도 "왜 적자만 내는 가게를 유지하느라 힘들어하느냐"며 감상실로 나가는 그를 말렸다. 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 쪼들리는 살림에 견디다 못한 어머니가 "감상실 입장료 좀 올리자"고 운을 떼면 아버지는 "어허" 하고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런 아버지 모습이 생각나서일까, 순희씨는 지금도 처음 온 손님에게는 입장료를 받지 않는다. 음악도 무료, 차도 무료로 즐기고 하이마트란 공간이 마음에 들면 그때 회원으로 가입하라는 것이다. 1년에 7만원을 내고 연회원으로 등록하는 손님 숫자도 점점 줄어들고 있다. 시내에 있는 순희씨 소유의 집에 세를 놓아 그 돈으로 적자를 메운다.

올해 초 클래식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하이마트의 근황이 소개되자, 옛 단골들이 전국 각지에서 전화를 걸어왔다. "가게를 옮긴 줄 몰랐다. 왜 제대로 알리지 않았느냐"고 호통치는 사람, "하이마트에서 만나 결혼했다. 연애 시절을 돌아보러 가겠다"고 반가워한 부부도 있었다. 한밤중에 전화를 건 한 노신사는 "밀려오는 추억에 가슴이 울렁인다"며 "항상 음악을 트는 마음으로 살아와 줘서 고맙다"고 했다. 더 어렵고 힘들어져도 순희씨가 하이마트를 지켜 가려는 이유다.

오후 5시가 되자 이른 저녁을 먹고 그가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분필에 물을 묻혀 가며 흑판에 베토벤의 교향곡 제목을 적는다. 20년이 훨씬 넘은 낡은 소파에 빳빳한 흰 커버를 입힌다. 감상실 한쪽 벽을 채우고 있는 석고 부조상(浮彫像)도 먼지가 앉았을까 꼼꼼히 살핀다. 7시30분부터 고전음악 감상회가 열리는데, 6시가 넘으면 손님들이 하나 둘 오기 시작할 게다. 한 달에 한 번 하이마트를 찾는 '대구악우회' 모임. 아버지 장례식 때 관을 들었을 정도로 하이마트에 애정이 깊은 단골이 주축이다. 매주 모이는 주부 클래식 감상반, 전통을 이어 온 대학 서클 등 정기적으로 찾아오는 동호회들이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준다. 어둑하던 감상실에 사람 온기가 채워지는 모양이 보기 좋다.

대구악우회 회장인 김현철(55.대구 동산병원 신장내과 전문의)씨는 의예과 신입생이던 67년 처음 하이마트에 발을 들였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친구들과 하루를 꼬박 이곳에서 보내곤 했다. 중간에 나가 점심을 먹고 저녁엔 막걸리 한잔하고 다시 들어와 음악을 들었다"고 추억한다. 최신식 오디오 시설을 집안에 장만해 두고도 여전히 하이마트를 찾는 것은 "함께 듣는 기쁨 때문"이란다. 어깨를 나란히 하고 앉아 음악을 듣고, 감상을 나누는 것만한 즐거움이 없다는 것. 그래서 지인들에게 동호회와 하이마트 선전을 열심히 한단다. 김현철 회장을 비롯한 오랜 단골들의 공통된 걱정거리 하나. "김순희 사장도 이제 60을 바라보는 나이인데, 언젠가 하이마트가 문을 닫게 되면 어떡하나." 걱정 어린 말에 순희씨는 "염려 마세요"라고 짧은 대답만 남긴다.

손님이 모두 돌아가고 나니 오후 10시가 가까워 온다. 찻잔을 씻고 감상실 소파를 정돈하며 하루를 마감한다. 스피커에서는 파이프 오르간 연주가 흐른다. 게오르그 뵘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프랑스에서 유학 중인 장남 박수원(35)씨가 어머니를 위해 자신의 연주를 CD에 담아 보냈다. 성당에서 오르간 반주를 맡아 하던 아들은 음대에 진학하고 싶어했다. 순희씨는 "뒷바라지할 여건이 안 된다"고 아들을 만류했었다. 무역학과에 입학한 아들이 열심히 취직 준비를 하는 줄로만 알았다. 하루는 손님 하나가 "이 집 아들 오르간 연주가 일품이더라"고 인사를 했다. 밤늦게 돌아온 아들의 가방을 살짝 열어보니 전공서적과 함께 악보가 잔뜩 들어 있었다. 놀라고 미안해 며칠 동안 아무 말도 못했다. 아들은 "내 힘으로 공부할 테니 염려 말라"고 했다. 다시 음대에 진학해 장학금을 받고 유학을 떠났고, 리옹 국제고등음악원을 최우수로 졸업했다. 감상실 소파에서 젖을 먹여 가며 키운 아들이다. 전축실에 앉아 할아버지의 글씨가 적힌 음반들을 골라 들으며 자랐다. 올 여름 수원씨는 피아노를 전공한 아내, 일곱 살.여덟 살인 아이들과 함께 대구로 돌아온다. 어머니를 이어 하이마트를 지켜 나갈 생각이다. "한 번도 말을 꺼낸 적은 없어요. 은근히 그래줬으면 하고 바라긴 했지만…. 지도 눈치를 챈 거겠지. 어릴 적부터 외할아버지 이야기를 곧잘 물어보곤 했었으니." 아들 이야기를 하는 동안 순희씨의 얼굴이 밝아진다.

생전 아버지가 그러했듯 지난 세월 그의 생활은 온통 하이마트였다. 감상실 위층에 살림집을 마련하고 아침부터 밤까지 이곳을 돌봤다. 휴일에도 자리를 비운 적이 없었다. "평생 해수욕 한번 하러 가 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바깥 외출은 성당의 새벽 미사를 다녀오는 것이 전부. 식사도 집에서 만들어 가져온 녹두전과 떡을 틈틈이 꺼내 먹는 것으로 때운다. 식사 시간도 없이 손님을 치를 때의 버릇이 남은 거란다.

정리를 마치고 순희씨는 휴게실 소파에 앉는다. 저녁 내내 쉬지 않고 감상실 안을 움직였다. 뻐근한 다리를 펴고 앉아 가만히 오르간 연주의 마지막 부분을 음미한다. 머잖아 8월이 되고 아들 가족이 돌아온 뒤 손자들의 목소리로 하이마트가 떠들썩해진 모습을 상상했다. 그러면 올 여름엔 생전 처음으로 해수욕을 하러 갈 수도 있겠다고, 순희씨는 웃었다.

<대구> 글=신은진 기자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 대구로 가는 출장길. 30여 년 전 대학 시절, 하이마트에서 친구들을 만나 대구 시내를 거닐곤 했다는 기자의 어머니가 동행했습니다. "어쩌면, 아직도 그대로 있었구나!" 감상실 문틈을 들여다보며 감탄하다, 어머니는 김순희 사장과 눈이 마주쳤습니다. 두 분은 손을 맞잡고 오래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50대인 두 분은 그 순간 20대 처녀들처럼 들떠 보이더군요. 내년이면 하이마트는 50살이 된답니다. 100년이 넘어서도 '고전음악감상실 하이마트'로 남아 있길 바라는 김순희 사장의 꿈이 꼭 이루어졌으면 하고 기원해 봅니다. 공평동 대구백화점 본점에서 중앙도서관 쪽으로 100m 직진, 도로변 안쪽으로 노란 간판이 걸린 건물 3층. 053-425-3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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