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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유의 정치, 여백의 정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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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차면 넘치고 부족하면 여유가 있어 보입니다. 1988년 5공 청문회 스타로 등장한 노무현 당시 국회의원은 지금 대통령 자리에 오르기까지 오랜 여백의 세월을 보낸 적이 있습니다. 92년 총선에서 낙마하고 98년 보궐선거에서 재기할 때까지입니다. 그의 삶의 궤적에서 이 기간은 영원히 잊지 못할, 인생의 여백이었을 것입니다.

95년 부산시장 선거 때였습니다. 그는 DJ(김대중)의 통합민주당 후보로 나섰습니다. 누구나 그의 참패를 예상했습니다. YS(김영삼)가 대통령이었기에 더욱 그랬습니다. 선거 결과 그는 낙선했습니다. 하지만 득표율은 대단했습니다. 38%나 됐으니까요. 당시 부산이 YS의 지지기반이요, 반(反)DJ 정서가 극심했던 것에 비하면 절반 이상의 성공이었습니다. 어쨌든 92년 총선에 이어 또 고배를 마셨습니다. 취재차 부산에 가 있던 저에게 그가 던진 익살이 아직도 귀에 맴돕니다. "어때? 나 이만하면 잘했지요?" 낙선자 노무현도, 저도 웃었습니다. 별다른 직책이 없던 시절, 그는 기자들과 소주 한잔 기울일 때도 여유 있는 모습을 자주 보였습니다. 한번은 한창 술 마시는 자리에 중년 부인이 나타났습니다. "내 집사람이야." 참석자들은 뒤로 넘어가는 줄 알았습니다. 권양숙 여사를 술자리에 불러낼 정도로 그는 친근하고 넉넉한 이미지를 풍겼습니다.

그랬던 노 대통령이었습니다. 그런데 대통령 취임 후 사생결단식으로 정국과 정책을 꾸려왔다는 말이 많습니다. 연거푸 쏟아지는 부동산 정책들도 숨이 넘어갑니다. 정부 스스로 "8.31 효과가 아직 나지 않았다"고 하면서도 3.30 대책을 발표했습니다. 더 센 조치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소리도 들립니다. 화폭에 온갖 정책을 다 쏟아부으면 다음 정책은 어느 여백에다 그려낼지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더군요. 일부 각료도 마음이 다급해지는 듯 싶습니다. 제가 아는 변양균 기획예산처 장관은 차분한 사람입니다. 차관 시절 그의 집무실을 찾은 저에게 "예산의 톱다운(Top-down.총액배분 자율편성) 방식에 대한 연구를 꽤 했지. 논문도 있는 걸"하며 차근차근 설명하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런 그가 요즘 재정지출 규모를 둘러싼 이슈에서 유별난 반응을 보였다 해서 놀랐습니다. 최근 서울 시내 한 백화점을 가봤습니다. 5층에 올라갔더니 매장 모양이 생소했습니다. 직각형이 아니라 오솔길 같은 S자형이었습니다. 직원에게 물었더니 이런 대답이었습니다. "직각형은 시각적으로 고객의 눈을 당황하게 합니다. 어디서부터 쇼핑을 시작할지 말이죠. S자형은 직각형보다 공간을 활용하기 어렵지만 소비자들이 여유를 갖고 요모조모 물건을 살펴볼 수 있게 합니다."

지도자가 서두르면 국민의 심장은 더 뜁니다. 노 대통령은 힘이 부족했을 때 지녔던 여유의 조각과 여백의 향기를 요즘처럼 힘 있을 때 쏟아내고 뿜어낼 수 없는지요. 노 대통령의 인솔로 국민이 백화점에 들어선 지 3년 반이 됐습니다. 이리저리 정신없이 다녔습니다. 그리고 이제 직각형과 곡선형 매장 두 갈래 길에 서 있습니다. 어느 길로 국민을 안내하시렵니까.

정선구 경제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