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운의 경제학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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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2호 34면

김하나의 만다꼬 

어느 날 엄마가 전화를 걸어 점을 보고 왔다고 했다. 전혀 그런 걸 믿을 분이 아니라 웬일이냐고 물었더니 사실은 엄마 친구가 마음고생 중이라 용한 점쟁이를 보러 가는데 같이 가달라고 해서 다녀왔다는 거다. 부산의 유명하다는 점쟁이 할아버지는 산 속에 사는데도 새벽부터 사람들이 찾아와 줄을 선다고 했다.

마침 그날은 간밤에 비가 와서 사람이 별로 없었기에 그리 기다리지 않고 점을 봤단다. 엄마 친구에게 점을 봐준 할아버지가 엄마에게 “그쪽은 뭐 물어볼 거 없소?” 하기에 엄마는 사실 궁금한 게 없었지만 산까지 타고 온 참이니까 떠오르는 대로 “딸내미가 서른이 넘었는데 결혼할 생각을 안 하네요”라고 했다. 다들 자식 결혼 걱정을 하니까 엄마도 그리 말한 거지, 엄마는 내가 결혼을 하면 마음이 편하겠지만 안 해도 어쩔 수 없다는 주의였다.

할아버지는 내 생년월일을 묻고 이것저것 짚어 보더니 말했다. “마, 걱정 마이소. 서른셋, 넷에 남편도 있고 자식도 있습니더. 앞으로 잘 살 낍니더.” 비에 젖어 촉촉한 산길을 내려오면서 엄마는 왠지 마음이 편안해졌더란다. “뉴욕 사람들한테는 테라피스트가 한 명씩 있다 안 하드나. 내가 저 영감재이 말을 믿는 건 아니지만 저래 말해주니까 마음이 편타. 내가 생각해 봤는데, 왜 현대사회에서 사람들이 점을 보러 가나 싶었더니 우리나라에서 점쟁이가 테라피스트 역할을 해주는 것 같아. 뭘 맞추고 말고 가 아니라 마음이 편하도록 말을 해주는 거야. 왜 그런 거 있잖아. ‘배우자가 그때 바람 안 났으면 간 때문에 쓰러져 죽었을 것’ 같은 말 들으면 ‘그래, 죽는 것보다는 낫지’ 하고 마음이 조금 나아지는 것 말이야.”

세월은 흘러 나는 서른셋, 넷을 아무 일도 없이 평온하게 지나 마흔이 넘었고 그 용하다는 할아버지는 용할 것도 없었음이 백일하에 드러났지만, 어쨌든 그때 엄마가 산길을 내려오며 마음이 편안해졌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얼마 전 친구 다섯과 태국 여행을 다녀왔다. 4박 6일의 여행 동안 아무런 문제도 없이, 그야말로 즐겁게만 보냈다. 누가 마음이 상하거나 뭘 두고 오는 일도 하나 없었다. 방콕 수완나품 공항은 굉장히 넓었다. 마지막으로 게임 한 판을 하고 같은 비행기를 타는 친구 넷은 먼저 들어갔다. 30분 뒤 다른 비행기를 타는 우리 둘은 카트를 밀고 공항 반대편의 게이트를 향해 걸어가며 공항의 엄청난 크기를 실감했다. 내가 말했다. “이번 여행처럼 완벽한 여행이 없었어. 어쩜 이렇게 아무런 트러블도 없이 여행을 끝낼 수 있었을까?”

입이 방정이라고, 결국 문제가 생겼다. 바로 내게. 탑승구에 도착해서야 여권과 탑승권이 없음을 깨달은 것이다! 나는 그 넓은 공항 반대편까지 뛰어가야 했다. 쩌렁쩌렁 “하나 킴 승객은 지금 당장 탑승하라”는 방송이 계속 울려퍼졌고 나는 승객들에게 민폐를 끼치며 다리가 풀릴 때까지 뛰고 또 뛰었다. 결국 여권과 탑승권을 찾은 내가 꼴찌로 비행기에 오르자마자 문을 철컥 잠그고 이륙했다. 땀이 비 오듯 했고 목이 타서 찢어지는 것 같았다. 돌아와선 심한 몸살을 앓았다.

친구들은 이 완벽한 여행의 액땜을 내가 한 거라고 했다. 액땜이라. 생각해 보면 액땜은 정신적 길항작용을 위한 참 멋진 말이다. 불운도 나름의 이유가 있다. 내가 칠칠치 못해서 생긴 일이지만 그런 바보 같은 실수도 나름의 역할을 한다는 위로. 행운과 불운은 교차하는 것이고, 그런 말을 통해 우리는 어쨌거나 다시 평정을 찾아간다. 점쟁이의 단언도, 액땜이라는 표현도 그 평정을 위한 보조제일 것이다.

브랜드라이터. 예스24 팟캐스트 ‘책읽아웃’ 진행자.『 힘 빼기의 기술』을 쓴 뒤 수필가로도 불린다. 고양이 넷, 사람 하나와 함께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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