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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백야』의 네바강변은 드라이브코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3면

레닌그라드시가 초현대식 명물로 자랑하는 프리발티스카야호텔(1980년 준공) 5068호실 북쪽창을 통해 핀란드만의 푸른 물결이 내려다 보인다. 13년전 헬싱키에서 천우사 전택보사장이 경제인회의에 참석한후 관광선편으로 레닌그라드를 여행한 사실을 취재한 기억이 새삼스럽다. 그때 여행신청을 했다가 언론인이란 이유로 거부당했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소련외곽만 돌면서 남의 이야기만 취재했던 셈이다. 그때 헬싱키부두에서 원망스럽게 바라보았던 핀란드만을 오늘날에는 레닌그라드에 들어와 바라보게 되었다. 엄청난 세상의 변화를 실감했다. 모스크바에서 함께온 「타냐」에게 가바니엑스포센터에서 개최중인 일렉트로니카88 전자전시회 취재를 하는 개인행동에 대해 양해를 구했다. 삼성·대우·금성등 한국가전3사가 여기에 참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시장은 호텔에서 택시로 10분미만의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핀란드만 부두옆 전시장앞에는 2천여명의 소련인들이 줄지어 입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전시장안은 발디딜틈도 없을정도로 구경꾼들로 가득 차있었다. 정문입구의 삼성, 그 왼쪽에 대우, 뒤편의 금성 스탠드 앞에는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한국제 TV·VTR·퍼스널컴퓨터·오디오및 가전제품들을 매혹된듯 보고, 또다시 보는 소련인들의 모습은 참으로 장관이었다.

<전시장의 80%차지>
한국전자제품들은 동독현지법인 이름으로 출품되었다. 형식적으론 동독회사 자격으로 이전시회에 참가한 것이다. 스탠드에 국적표시를 하지못했으나 전시담당자인 한국상사원들에게 소련당국은 모두 비자를 발급했다.
특히 필립스등 서방전자회사 14개사가 나왔지만 한국의 3사가 전시장 면적의 80%를 차지, 마치 한국전자전시회를 방불케했다. 이번에 일본은 참가하지 않았다. 이 전시회에서 다른 서방회사들의 스탠드들은 한쪽구석에 틀어박혀 주목을 끌지못했고, 다만 한국 3사들의 독무대같았다. 특히 개막식때는 레닌그라드시 「부킨」부시장등 고위인사들이 한국기업인들과 함께 한국3사 스탠드의 테이프를 끊어 환영을 표시했다.
소련정부가 한국과의 경제교류를 강력히 바라는듯한 새로운 정책의 한 측면을 여기서도 읽을수 있었다.
한국가전3사는 소련매스컴의 화려한 각광을 받았다. 비록 한국이라는 나라이름은 전혀 밝히지 않았지만 관영TV는 주로 삼성의 멀티비전과 대우의 가전제품및 금성의 TV등을 세차례나 소개했다.
또한 공산당기관지인 『레닌그라드스카야 프라우다』는 5욀12일자에 삼성스탠드, 13일자에 대우스탠드의 사진을 크게 싣고 전시내용을 자세히 보도했다. 소련매스컴의 보도는 국적을 밝히지 않는 한계를 보였으나 한국제품들을 의식적으로 크게 부각시켰다. 이때문에 날마다 1만5천여명의 관람객들이 쇄도, 한국전자제품이 인기를 독차지할수 있었다.
소련 관람객들은 다음의 세가지로 분류된다.
먼저 라디오산업성·체신성·전자산업성등에서 직접 찾아온 관리들이다. 이들은 주로 부품에 깊은 관심을 보이며 기술협력의 가능성을 타진했다. 둘째로 포지트론positron)등 전자업체의 구매담당자들과 기술자들이다. 이들은 제품마다 자세히 뜯어 관찰하면서 가격을 묻고 거래가능성을 타진했다. 마지막으로 일반소비대중이다.

<컬러tv 드물어>
이들중 여자들은 전자오븐과 청소기등 값싼 가전제품들에 큰관심을 보인 반면 남성들의 인기품목은 소형 카세트 라디오와 컬러TV등이었다. 존 L 쉐러사가 낸 데이타에 따르면 소련의 TV보급댓수 9천만대중 6천5백만대가 컬러TV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과장된 수치인것 같다. 투숙했던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의 고급관광호텔에도 혹백TV밖에 없었기때문이다.
컬러TV값은 「라두가」「루빈」등 소련제가 6백∼8백루블(크기에 따라)선. 노동자 월평균임금 2백1루블을 3개월 모아야 한대를 살수 있다.
페레스트로이카이후 각기업에 대한 수입통제가 풀린다고 하지만 코메콘식 구상무역을 고수하고있기 때문에 신용장개설방식의 직무역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 한국가전3사의 공통된 견해였다. 그래서 한국의 스탠드를 방문한 관리들과 기술자들은 주로 J/V등 합작투자에 의한 현지생산 가능성을 주로 타진했다는 것이다.
또한 레닌그라드상공회의소「라코프」회장등이 삼성의 간부들과 오찬을 하면서 경제교류를 협의했는데 주로 합작공장설립이 소련측의 희망이었다고한다. 대우·금성측도 이곳 고위인사들과 접촉결과 비슷한 이야기였다는 것이다. 다만 이번 전시회를 계기로 앞으로 모스크바등의 국제전자전시회에 한국의 가전3사가 공식적으로 참가요청을 받아 한소간 경제교류의 단서를 열게된 점이 하나의 성과로 지적되었다.
이곳 매스컴의 보도에 민감한 반응을 나타낸 것은 한국동포들과 북한유학생들이었다. 이들은 삼성·대우·금성의 상호를 뉴스를 통해 듣고 『한국에서 왔다』며 하루평균 20여명씩 구경하러 왔다. 기자도 삼성스탠드에서 2명의 북한유학생들을 만났다. 이들은 장발에다 블루진과 점퍼차림으로 서방국의 한국유학생들 복장과v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레닌그라드대학에서 이공계통을 배우고 있다는 이 유학생들은 동포를 위해 소련에서 귀한 쌀을 구해왔다고 하면서 벌써 세번째 들르는 것이라 했다.

<북한유학생도 참관>
이 유학생들은 전자쇼를 본 소감을 묻자 『남조선동포들을 만나 반갑다. 또한 강대국 소련사람들이 감탄하는 전자기술을 갖고와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곧이어 이들은 서울올림픽에 관심이 많은듯 남북공동개최가 왜 안되느냐고 묻는 것이었다.
이에대해 올림픽개최지는 국가단위가 아니라 한도시에 지정하기 때문에 올림픽규정을 고치기 전에는 남북공동개최가 불가능하다. 좋은 예로 동독의 뮌헨올림픽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때 동독이 참가했음을 상기시켰다. 국제올림픽위원회가 서울올림픽경기의 몇종목을 평양에 떼어주기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이를 받아들이지않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말했다.
북한학생들은 고개를 끄덕였고, 올림픽규정을 몰랐다고 하면서 『조선은 그래도 올림픽에참가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북한의 체제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더니 그들은『우리는 수령님을 숭배한다. 그 나머지는 존경하지 않는다』고 서슴지않고 대답했다.
『그러면 권력을 세습받는 김정일은?』『존경하지 않는다.』『학생들의 말을 들으니 북에도 변화가 있는것 같은데?』『아마도 우리세대가 주체가 될때는 많이 변할 것이다.』
『그러면 통일의 전망은 밝은것 같은데?』『우리세대가 주도하는 날에는 그 문제도 풀릴것이요.』
『북한의 학생들도 자네들과 같은 생각을 하는가?』『통일등에 많은 생각을 한다. 우리는 자유롭게 생각하고 말한다….』

<「혁명의 요람」자랑>
『학생들은 레닌그라드라는 보다 자유로운 곳에서 공부하면서 생각을 달리하게 된것이 아닌가?』『그렇지 않다. 그러나 모스크바대학의 유학생들은 우리와는. 다를 것이다. 그쪽은 인문·사회과학전공이고 우리는 자연과학계통이니까.』
북한학생들과 대화를 나눈후 리무진택시편으로 네바강변 드라이브에 나섰다. 고등학교 영어교사로 삼성스탠드에 파견나온 중년부인 「리타」의 안내를 받았다.
레닌그라드에서 작가생활을 한「도스토예프스키」의 초기작품『백야』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백야』의 무대가 바로 네바강변이었다. 남녀주인공은 한밤인데도 낮처럼 밝은 이 강변을 산책하면서 순수한 사랑을 나누며 낭만적인 꿈을 키웠던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네바강변은 19세기의 옛분위기는 찾을수 없었다.
우안을 따라 프롤레타리아독재광장, 로베스피에르노등을 거쳐 리테이니다리를 건넜다. 그 왼편에 전설적인 순양함 오로라호가 정박하고 있다. 레닌그라드는 이처럼 「혁명의 요람」이라는 진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오로라호는 러시아혁명의 일등공신이다. 발틱함대소속 순양함인 이 군함은 혁명군이 「케렌스키」정부가 점거중인 동궁을 공격할 때 주포 한발을 동궁을 향해 발사, 공격신호를 보낸 것으로 유명하다. 노일전쟁때 동해에 참전한바 있는 이군함은 1948년 네바강 우안에 정박, 해군박물관분관이 되었다. 1956년부터 일반에 공개, 레닌그라드의 관광명소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곳은 많은 관광객들로 붐비고 있었다. 군함속 식당에는 캐비아(철갑상어알젓)와 러시안 수프가 일품이라고 한다. 지금도 구체제때처럼 수병이 보초를 선 이 군함안에는 시간이 늦어 (오전10시∼오후 5시까지) 구경할수 없어 안타까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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