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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넣으면 기보가 척척…대국장 풍경 바뀐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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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바둑판 촬영 기계. [사진 사이버오로]

바둑판 촬영 기계. [사진 사이버오로]

지난 14일 대구에서 열린 2018 자몽신드롬배 내셔널바둑리그 개막전. 대국을 위해 마주 앉은 선수들 옆으로 낯선 기계가 한 대씩 설치됐다. 기계는 바둑의 시작부터 끝까지, 반상의 진행 상황을 꼼꼼히 영상으로 저장했다. 이어 대국이 끝나자 녹화된 영상은 컴퓨터 프로그램 처리를 거쳐 ‘기보(棋譜)’로 재탄생했다.

기보 자동입력 국내 프로그램 첫 선 #휴대전화 촬영 영상도 곧바로 변환 #시간패·반칙패 '비디오 판독' 가능

내셔널바둑리그에서 성공적으로 첫선을 보인 이 프로그램은 ‘기보 자동 입력기’다. 국내 연구팀(오펜소프트·대표 허경석)이 개발한 이 프로그램은, 영상을 분석해 바둑판의 좌표를 인식한 뒤 수순에 따라 자동으로 기보를 제작한다. 무인 기보 제작 과정은 비교적 간단하다. 비디오카메라를 바둑판 위에 설치한 뒤, 촬영한 영상을 컴퓨터 프로그램에 연결하기만 하면 끝이다. 허경석 오펜소프트 대표는 “대국장에서 실시간으로도 기보 제작이 가능하고, 다음에 녹화분을 기보로 전환할 수도 있다. 핸드폰으로 찍은 영상도 된다”고 설명했다.

바둑에서 가장 중요한 기록이라 할 수 있는 기보는 그간 사람이 직접 입력하는 방식으로 제작됐다. 과거 아날로그 시절에는 사람이 직접 기보지에 펜으로 기보를 적었고, 최근 들어서는 수순에 따라 컴퓨터에 돌의 좌표를 찍는 방식으로 기보를 만든다.

기보 자동 입력기가 본격적으로 도입되면 입력자가 없어도 기보를 남길 수 있고, 입력자 실수로 수순이 잘못 입력되는 일도 사라지게 된다. 인력 문제로 기보를 남기지 않았던 예선 대국까지도 모두 데이터베이스화할 수 있다. 정확도 높은 기보의 양이 폭발적으로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영상은 프로그램을 거쳐 기보로 자동 전환된다. [사진 사이버오로]

영상은 프로그램을 거쳐 기보로 자동 전환된다. [사진 사이버오로]

대국 내용을 영상으로도 남기기 때문에, 대국자의 착점과 사용 시간도 정확히 파악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시간패나 반칙패 같은 논란이 발생했을 때 영상을 되돌려 시비를 명확히 가릴 수도 있다. 이전에는 논란이 발생하면 심판의 재량이나 대국자의 양심에 판단을 맡겨야 했는데, 이제는 다른 스포츠 종목처럼 ‘비디오 판독’을 통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된다.

그간 국내외에서 무인 기보 기록 장치를 개발하려는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정확도가 떨어지거나, 센서가 장착된 바둑판을 별도로 제작해야 하는 등 비용이 발생했다. 이런 이유로 무인 기보 기록 장치를 실제 대국장에 적용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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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황에서 입력기 개발을 다시 제안한 건 현재 프로기사회 회장인 손근기 5단이다. 그는 “몇 년 전에 연구생 시절 기보를 찾아보려고 한 적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애써도 찾을 수 없었다. 기보를 찾기 어려운 옛 바둑이 많다는 게 아쉬웠다”며 “기보 작성이 쉬워져야 기보가 많이 남을 수 있다고 생각해 개발을 의뢰했다”고 말했다.

이번에 실용화에 성공한 기보 자동 입력기의 정확도는 100%에 가깝다. 대국자가 빠른 속도로 ‘패’를 따내는 장면에서도 높은 정확도를 나타냈다. 바둑돌이 교차점에서 약간 벗어나 있더라도 가장 가까운 교차점으로 좌표를 인식하기 때문에 별문제가 없다. 다만 100%에 가까운 정확도는 실내 대국에 한정된다. 야외에서 바둑을 둘 경우, 직사광선의 영향으로 프로그램이 흑돌과 백돌을 혼동해 인식할 여지가 있다.

한편, 기보 자동 입력기의 등장으로 대국장 풍경이 달라질 것에 대해 아쉬움을 나타내는 목소리도 있다. 기보 입력자의 일자리가 줄고, 중요 대국을 간접 경험할 기회가 사라진다는 이유에서다. 유창혁 9단은 “중요한 바둑의 기보를 입력하는 일은 대국장에서 선수들과 함께할 수 있는 소중한 경험이다. 기계화에 따른 장점도 분명 있지만, 바둑에서 사람의 영역이 줄어드는 것 같아 아쉽기도 하다”고 말했다.

정아람 기자 a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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