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분수대

'양념'이라는 걸림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1면

안혜리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안혜리 논설위원

안혜리 논설위원

“문자폭탄을 ‘양념’이라고 할 때 정말 황당하고 이상했는데….”

유승민 바른미래당 공동대표의 말마따나 여당 실세 의원과 청와대 비서관 등 권부 핵심인사가 등장인물로 출연하는 ‘민주당원 댓글 조작 사건’을 계기로 문재인 대통령의 과거 ‘양념’ 발언이 시중에 다시 회자되는 중이다. 대선을 한 달여 앞둔 2017년 4월 당내 경선 승리 후 한 종편 뉴스에 출연한 문재인 당시 후보는 “문자폭탄과 상대 후보 비방 댓글 등 여러 가지가 문 후보 쪽 대선 단체톡방에서 조직적으로 이뤄진 게 드러났다”는 앵커의 질문을 받고는 “치열하게 경쟁하다 보면 있을 수 있는 일”이라며 “경쟁을 더 흥미롭게 만들어주는 ‘양념’ 같은 것”이라고 답했다. 당 밖은 물론 당내에서조차 “상처에 소금 뿌리기”(박영선 의원)라는 식의 거센 반발이 일자 “질문을 오해했다”며 한발 물러서긴 했지만.

당시 문 후보가 정확히 어떤 의미로 양념이라는 단어를 갖다 썼는지는 모르겠다. 양념은 사전적으로는 간장·된장 등 음식 맛을 돋우기 위해 쓰는 재료를 의미한다. 주연이 아닌 조연, 필수가 아닌 선택, 핵심이 아닌 곁가지라는 뜻이다. 하지만 한식에서 양념은 결코 조연이 아니다. 오히려 알파이자 오메가(시작과 끝)라고 봐야 한다. 재료 본연의 맛을 내세우는 게 요즘 미식 트렌드라지만 집밥이든 식당 음식이든 재료 그 자체보다 양념에서 맛의 승부가 갈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 말이다.

음식평론가 이용재는 『한식의 품격』에서 이렇게 압도적인 역할을 맡는 양념을 칭송하기는커녕 오히려 맛의 ‘걸림돌’로 표현한다. 양념이 원래의 뜻 그대로 재료의 맛을 끌어내는 보조적 역할에 머무는 게 아니라 재료의 본질적인 맛까지 덮어버린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양념 범벅이 된 음식을 먹으면 고기든 채소든 재료가 무엇이든 간에 순간적으로 달고 짜고 매운 양념 맛에 휘둘릴 수밖에 없다. 쉽게 말해 좋지 않은 재료로 만든 음식도 맛있는 음식처럼 속는다는 얘기다.

어디 음식에서만 그럴까. 이번에 드러난 민주당원 드루킹(김모씨)의 댓글공작을 보면 댓글 양념도 크게 다르지 않다. 어떤 사안에 대한 지지자의 적극적인 의사표시라는 역할을 넘어 여론을 교란시켰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본디 재료가 안 좋을수록 양념은 과해지기 마련이고, 그러다 양념이 너무 과하게 들어가면 음식 맛까지 버린다. 마구 뿌려대다가 오히려 걸림돌이 돼버린 양념, 지금 누군가에겐 드루킹이 딱 그런 양념이 아닌가 싶다.

안혜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