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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개미와 베짱이 시즌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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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서경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서경호 논설위원

서경호 논설위원

요즘 한국과 미국, 중국과 미국의 무역 갈등을 보면 이솝 우화 속 개미와 베짱이가 떠오른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무역 적자 규모에만 관심 있다. 무역 적자는 상대국이 불공정하게 미국을 착취한 결과라는 게 그의 믿음이다. 경제학자들이 입 아프도록 설명해도 소용없다. 무역 적자에 대한 경제학자의 설명은 단순 명쾌하다. 미국이 베짱이처럼 과소비하며 살고 있어서다. 미국 가계가 저축보다 소비를 많이 하고 기업과 정부가 투자를 늘렸기 때문에 해외에서 상품과 서비스가 더 많이 들어오고 있는 것이다. 한국 등 특정 국가를 상대로 관세를 올리거나 쿼터로 막아도 미국인이 소비와 투자를 줄이지 않는 한 무역 적자 총량은 달라지지 않는다.

반면 한국과 중국의 무역 흑자는 개미처럼 허리띠를 졸라매고 소비 대신 저축을 하며 열심히 일한 덕분이다. 물론 베짱이 생각은 좀 다르다. 개미들이 외환시장에 인위적으로 개입해 자국 통화가치를 의도적으로 낮게 유지한 덕에 수출을 늘린 것 아니냐고 의심한다. 미국은 지난 주말 발표한 환율보고서에서 중국·일본·독일·스위스·인도와 함께 한국을 환율조작국 전 단계인 관찰대상국으로 분류했다. 환율조작국 지정은 면했지만 외환시장 개입 내역을 밝히라는 미국의 노골적인 압력에 노출됐다. 외환 당국은 정보 공개의 적정 수위를 고심 중이다. 자칫하면 우리의 환율 주권이 훼손될 수 있고, 정보를 너무 많이 공개할 경우 투기세력에 악용될 수 있어서다. “달러는 미국의 통화지만 당신들의 문제다(The dollar is our currency, but your problem).” 1971년 존 코널리 미국 재무장관의 유명한 어록이다. 당시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금 태환 정책 포기로 브레턴우즈 체제가 무너지며 생긴 글로벌 경제의 혼란을 남 탓으로 돌린 것이다. 지금 제 2, 3의 ‘코널리’가 한국의 목울대를 옴팡지게 잡고 흔들고 있다.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이제 더 이상 개미와 베짱이는 아름다운 우화가 아니다. 개미처럼 열심히 일해야 성공하고 베짱이처럼 흥청망청 놀면 나중에 곤욕을 치른다는 인생 교훈은 옛날 얘기다. 겨울에 뒤늦게 후회하고 눈물 짓는 베짱이를 개미가 넉넉한 마음으로 배려하는 공생 스토리도 현실과 거리가 있다. 겨울이 와도 개미와 베짱이 신세는 역전되지 않고, 개미는 베짱이에게 아량을 베풀 기회조차 없으며, 베짱이의 갑질은 계속되고 있다. 개미와 베짱이 시즌2는 냉혹하고 비정한 폭력이 난무하는 하드보일드 사실주의 소설이 돼버렸다.

서경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