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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조현민식 갑의 분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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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이현상 논설위원

이현상 논설위원

분노는 불(火)이다. 참기 어렵다. 오죽하면 아리스토텔레스가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마땅한 때에, 마땅한 방식으로, 마땅한 시간 동안 화를 내는 사람은 칭찬할 만하다”고 했을까. 이렇게 말한 아리스토텔레스조차 내면의 화는 어쩔 수 없었나 보다. 말년에 정치적 상황 때문에 아테네를 떠나 인근 도시 할키스로 망명한 뒤 1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사인은 스트레스성 위장병으로 추측된다.

병적으로 화를 자주 혹은 심하게 내는 사람을 보면 ‘분노조절 장애’를 의심한다. 분노조절 장애는 의학적으로 정확한 진단명이 아니다. 간헐적 폭발 장애, 경계성 성격 장애, 적대적 반항 장애 같은 여러 질환의 증세를 뭉뚱그려 부르는 용어다. 이 중 흔히 말하는 분노조절 장애와 가장 가까운 것이 ‘간헐적 폭발 장애(IED)’다. 별것 아닌 일에 갑자기 화를 내거나 폭력을 행사한다. 스트레스를 조절하지 못하거나 자존감 결여에 시달리는 사회적 약자에게서 일어나기 쉽다. 대한신경정신의학과에 따르면 우리나라 성인 중 치료가 필요한 정도의 고위험군이 11%에 이른다.

광고대행사 직원에게 물을 뿌린(혹은 회사 측 설명대로 컵을 바닥에 던진) 대한항공 조현민 전무의 ‘갑질’이 말썽이다. 조 전무로 추정되는 인물이 사무실에서 간부에게 고성(혹은 괴성)을 지르는 녹음파일까지 공개됐다. 잊혀 가던 언니의 땅콩 회항 사건까지 소환되면서 ‘천민자본주의’ ‘부끄러운 대한항공 태극마크’ ‘분노조절 장애’ 같은 댓글이 올라온다. 이런 일이 다반사였다는 직원들의 증언이 사실이라면 경영 대신 정신과 상담을 진지하게 권하고 싶다.

그 전에 체크할 게 있다. 간헐적 폭발 장애는 정신적 ‘블랙아웃’을 동반하는 게 보통이다. 만취해 필름이 끊기는 것과 비슷하다. 눈에 보이는 게 없어진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런 증세가 아랫사람에게만 일어난다면 그건 ‘선택적’ 조절 장애다. ‘선택’과 ‘조절 장애’는 모순이다. 병이 아니라 “나는 화를 잘 내는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가 알아서 조심해”라는 신호일 뿐이다.

분노 조절을 위한 심리학자들의 조언 중에는 “신속하게 비용 대비 효과를 분석하라”는 것도 있다. 화를 낸 이후 상황을 감당할 수 있을까 따져보라는 이야기다. 사실 대부분의 ‘을’들이 화를 참는 방법이다. 그러고는 화가 쌓여 병이 되지 않기 위해 명상·독서·운동 같은 이런저런 노력을 한다. 조 전무를 비롯한 이 땅의 갑들은 스스로 물어볼 일이다. 화를 내야 해서 화내는 게 아니라 화를 내도 되니까 화내는 것 아닌가.

이현상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