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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군내·원호관계 환수는 미공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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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1, 2차에 걸친 권력형 부정축재자 수사로 국민들에게 구정치인들에 대한 환멸과 새 정치에의 기대를 부추기는데 어느정도 성공했다고 판단한 신군부는 서둘러 사건을 마무리하고 정권 획득을 위한 다음 단계의 작업에 들어가야만 했다.
그래서 계엄사는 이들의 명단과 헌납 (?) 내용을 언론에 대대적으로 발표하고 이 돈을 공익사업을위해 사용하겠다고 밝혔다 <별표>.
부정축재자 수사는 계엄사의 합동수사본부 제1국장인 이학봉대령이 책임을 맡았으며 환수재산의 처리는 제1국의 기부재산처리위원회(위원장 금재태)가 했다. 처리위원회는 현직 부장검사·재무부 공무원·계엄사 수사관등 20여명으로 구성됐으며 81년1월24일 계엄령 해제때 해체되었다.
계엄사는 2차 연행자 환수액을 발표하면서 앞으론 권력형 부정축재문제로 연행, 조사하는 일은 없을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후일 밝혀진 자료들은 80년 당시 계엄사는 김종필씨등 69명으로부터 7백16억원을 환수했다고 돼 있다. 1차 10명 2차 17명 외에 42명이 더 있다는 얘기다. 공개안된 대상은 육본범죄수사단등이 처리한 군납·원호관계부정 관련자등으로 밝혀졌다.
당초 박정희대통령 시해사건 수사를 위해 군·검·경관계자들로 구성됐던 계엄사 합동수사본부는 계엄업무의 확대로 3개 수사국을 거느리는 수사단으로 증편됐다.
당시 합동수사본부가 얼마나 무소불위의 권한을 휘둘렀는지에 대한 관계자의 증언.
『우리는 종교계 부조리도 척결한다는 방침에 따라 1차로 불교계를 수사키로 했었습니다. 착수직전 상부의 지시로 무산됐읍니다만 2, 3국은 비교적 규모가 작은 것을 다뤘지요. 육본범죄수사단이 중심이 된2국은 군관계 부조리를 맡았읍니다. 4건에 50여억원 정도의 부정을 적발한 것으로 압니다. 박대통령 조카인 모씨의 8군 잉여고철사건도 그중 하나입니다. 상이군인 장모의재산을 환수할 때엔 그의 신체상 특수성을 감안, 승용차는 돌려줬지요. 그리고 치안본부 특수수사대 (대장 김영두총경·현경북도경국장)가 주축이 된 3국은 보안사 H소령의 지휘·감독아래 권력형 비리 관련 제2차 연행자등의 수사를 맡았습니다. 보안사 S분실에서 일단 기를 꺾어 놓은 인사를 넘겨받아 수사한것이죠. 이밖에 치안본부수사팀 (팀장 안모총경·작고)은 기타 잡범들을 처리했지요.』
이렇게 수사해 취합된 환수재산은 국민복지기금으로 활용한다고 발표됐다. 그러나 구체적인 용처가 그때 바로 결정된 것은 아니다.
『전두환상임위원장의 지시에 따라 활용 방안이 모색됐읍니다. 1국산하기부재산처리위원회는 지방에 병원또는 도서관 건립등의 방안을 검토했었지요. 국보위 분과위원장들이 비공식 모임등을 통해 의견을 나눈 결과「서민을 위한 임대주택 건설」쪽으로 모아졌읍니다. 구상은 좋은 것이었지요. 건설분과위원장인 이규효씨와 간사인 안무혁대령이 주관, 계획을 마련했읍니다. 하지만 8백억원 정도로는 엄두도 못낼 사업이었고 구상에 그쳤지요. 서민주택 1백만호 건설이란 말은 그럴듯하지만 서울시 면적만큼의 택지조성을 해야하는 일이아닙니까. 그럴즈음 국보위 회의를 거치지도 않은 「농어촌 후계자 양성 기금」으로 결론이 났읍니다. 박종문농수산분과위원장이 건의한 이 안은 보안사 권정달정보처장등의 지지를 받아 채택됐다고 들었읍니다.』국보위분과위원장이었던 C씨의 부언.
결국 환수한 부정축재 재산은 농어촌 지원에 사용되게 됐다. 그러나 계엄사가 발표한 부정축재액전부가 기금이 된 것은 아니었다.
계엄사는 재산을 헌납한 인사들이 먹고 살도록 수억원 정도씩을 떼줬고 환수한 부동산·골동품·서화등은 경매과정에서 발표액에 못미쳤기 때문이다
환수한 재산의 전체적인 윤곽은 80년9월 이미 대통령이 된 전장군이 정종택농수산장관·박종문국보위농수산분과위원장으로부터 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드러났다.
전대통령은 심화되는 농어촌 인력난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농어촌후계자 양성이 시급하다며 환수금 8백30억원 가운데 학교시설등 공공재산을 제외한 나머지 환수가능부분3백50억원 전액을 여기에 투입토록 지시했다.
80년10월27일 국보위가 발족 4개월여만에 간판을 내리자 기부재산처리위원회는 기금관리를 농협등에 이관했다.
농협측은 환수재산을 매각, 현금화작업을 서둘렀다. 81년4월30일 대한통운 영등포지점 창고에 첫 개설된 환수재산 경매장에는 서화·골동품등이 진열됐다. 국산 선풍기 6대까지 매물로 나왔으나 응찰자가 없었다.
경매는 다음날 (5월1일) 농협중앙회 강당으로 이어져 보석류 1백20점이 매물로 나왔다. 2.08캐럿짜리 다이아몬드 반지가 1천7백만원에 낙찰되는등 1백여점이 팔려 8천6백17만원의 수입을 올렸다. 또 이날 오후 같은 장소에서는 옷감 경매가 있었다.
이밖에 김종필·김진만씨등의 농장에서 기르던 사슴·공작등 값비싼 동물들과 소들도 경매에 부쳐져 처리됐다.
그러나 일부 덩치 큰 부동산과 주식등은 매각이 안돼 그대로 보유하거나 당초의 주식 소유자에게 원가에 되돌려 팔기도 했다.
김종낙씨에게서 환수한 코리아타코마사 주식 45억원어치는 현금을 받고 되팔았으나 정해영씨에게서 가져온 20억원어치의 주식은 팔리지않았고 정씨의 아들인 정재문씨도 매입을 거부했다.
이렇게해서 마련된 돈이 7백16억원 (84년10월 재무부의 국회제출자료)이었다.
여기에 나타난 금액은 애당초 부풀리고 그중 일부만을 환수하거나 일부를 본인에게 떼어주기도해 1차의 8백53억원, 2차의 70여억원, 기타 미공개분등을 합친 것보다 적었을뿐 아니라 80년9월 전대통령이 언급한 8백30억원에 크게 밑도는 것이었다.
이에대해 재무부측은 『합수본부로부터 이관받은 8백38억원 가운데는 박대통령 시해 관련자 4명으로부터 환수한 1백23억원이 포함돼 있고 이를 방위성금등으로 국고에 편입했기 때문』이라며 『그 나머지가7백16억원』이라고 해명했다.
또 당시의 관계자들은 『주식등 유가증권과 귀금속값은 확실했지만 부동산·서화·골동품등은 가격을 산정하는데 문제가 있었다』며『당시의 시세·고시가·중개인의 추정등을 종합해 평가했다』고 말했다. JP의 제주도농장등을 산정할 때엔 관계자들이 직접 귤을 따다 팔기도 했다는 것.
계엄사에 파견돼 법적 뒤처리를 담당했던 L검사는 『「봐주라」는 청탁도 있고해 제대로 환수못한 것도 있었다』고 말했다.
재무부는 또 앞서의 7백16억원중 4백억원은 농어민 후계자 육성기금으로 이관하고 나머지 3백16억원은 공익재단에 출연했다고 밝히고 있는데 육성기금을 넘겨받아 관리하는 농협중앙회산하 육성기금관리사무국의 것과 약간의 차이가 있다.
농협을 감독하는 농수산부에 따르면 『환수금 3백95억원을 모체로 전국에서 4만명을 선발해 1인당 6백만원에서 1천만원까지 융자해주고 있으며 그간 각계의 출연으로 87년말 현재 기금 총액은 2천8백억원에 이른다』는 것.
그리고 재무부가 말하는 공익재단이란 한국지도자육성장학 재단을 말하는 것으로 김종필씨가 설립한 한서장학재단, 이후낙씨의 울산육영회, 김진만씨의 서울장학재단등 재산 3백16억원이 무상증여됐다.
이 재단은 JP의 감귤농장 47만평방m중 33%를 서귀포시에, 서산농장 2천53만평방m중 1천50만평방m를 축협등에 각각 매각처분하는 등으로 89억5천만원을 확보했고 이를 재원으로 83년부터 대학생 및 고교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다. 울산여상등 2백26억원 상당은 매각불능이었다.
문교부 자료에 따르면 이 재단은 87년 2천7백77명의 장학생을 선발, 15억원의 장학금을 지급했고 88년에는 2천7백22명을 선발, 18억여원을 지급하는 것으로 돼있다. 그리고 기본재산은 현금 1백20억6천만원과 부동산 29억5천만원(3백11만평)등 1백50여억원이며 박지수이사장을 비롯한 이사진이 모든 사업계획등을 결정한다.
이 재단은 원래 71년9월 박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민관협동의 한국장학재단으로 설립됐으며 82년3월 막대한 환수재산을 무상증여받으면서 명칭도 현재의 것으로 바꾸었다. 당초 기금은 10억원.
이 재단이 새삼 세인의 주목을 끌고 문제가 된 것은 권력형 부정축재자의 환수재산을 기금으로 장학사업을 벌이고 있어서가 아니라 권력형 비리로 구속, 조사를 받고있는 전경환전새마을본부중앙회장이 83년부터 87년까지 재단이사장직을 맡아왔기때문. 재단측은 새마을본부가 발행한 수첩 (85년)이 유관단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대해 전혀무관하다고 펄쩍 뛴다. <특별취재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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