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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형→무죄' 피묻은 휴지의 반전 … 카페 여주인 누가 죽였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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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법조 기자의 판결 다시 보기 

2007년 4월 24일 오전 수원 매탄동의 한 카페에서 여주인 이모(당시 41세)씨가 흉기에 수차례 찔려 숨졌습니다. 용의자의 것으로 의심되는 담배꽁초가 현장에서 발견돼 사건의 실타래가 쉽게 풀릴 것으로 예측됐습니다. 하지만 범인의 행방은 오리무중이었고, 어느덧 ‘미제사건’이란 딱지가 붙습니다.

사건이 세인의 뇌리에서 잊혀져갈 무렵인 6년 뒤, 의외의 상황에서 실마리가 포착됩니다. 2013년 일용직 노동자 박모(36)씨는 여성의 가방을 빼앗고 넘어뜨린 혐의(강도 상해)로 경찰에 붙잡혔습니다. 그런데 박씨의 DNA가 담배꽁초 DNA와 일치한 겁니다. 경찰은 수원구치소에 구금된 박씨를 추궁해 자백을 받아냈습니다. 드디어 해결되나 싶던 사건은 박씨가 “카페에 갔지만 살인은 안 했다”고 진술을 번복하면서 다시 꼬여버립니다. 검찰은 결국 박씨를 기소하지 못했습니다.

6년만에 꽁초 DNA 일치 용의자 등장 

그렇게 3년이 흐른 2016년, 수원지검 검사실에서 새 국면이 펼쳐집니다. 한 검사가 사건 기록을 검토하다가 의심스러운 단서를 발견한 겁니다. 바로 이 사건에서 가장 논란이 됐던 ‘피 묻은 휴지’입니다.

수원 카페 여주인 살인사건 현장

수원 카페 여주인 살인사건 현장

카페 화장실의 변기엔 두루마리 휴지가 하나 놓여 있었습니다. 국과수의 유전자 감식 결과 이 두루마리에선 박씨와 여주인의 희미한 혈흔이 동시에 검출됩니다. 박씨가 범인이라는 의심이 강하게 들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실제 검찰은 박씨를 기소했고 2017년 6월 29일 1심 재판부(수원지법 형사12부)는 박씨에게 징역 15년을 선고했습니다. 피 묻은 휴지와 박씨의 ‘구치소 자백’ 등의 증거능력이 인정된 것입니다. 10년 만에 ‘진범’이 나왔으니 ‘과학수사의 힘’이란 찬사가 나올 만했습니다.

사건은 그렇게 끝나는 듯했습니다. 그런데 불과 6개월 뒤인 2018년 1월 25일, 박씨는 항소심(서울고법 형사9부)에서 무죄를 선고 받고 풀려납니다. ‘징역 15년’이 ‘무죄’로 뒤집혀버린 겁니다.

휴지서도 혈흔, 1심선 증거로 인정 

항소심 재판부의 판단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박씨가 범인이라는 증거가 없다”는 것입니다. 재판부는 먼저 ‘핵심 증거’였던 피 묻은 휴지가 살인의 증거가 될 수 없다고 봤습니다.

카페 화장실은 남녀 공용이었고, 휴지걸이가 없었습니다. 양변기 위에 올려진 두루마리 휴지를 손에 들고 사용해야 했습니다. 두 사람의 혈흔이 동시에 검출된 곳은 ‘휴지심’ 안쪽 부분이었습니다.

재판부는 “코를 풀거나 용변을 보는 과정에서 박씨와 여주인의 DNA가 묻었을 수 있다”고 봤습니다. 또 “맥주병을 깨 놓는 등 증거를 인멸한 범인이 두루마리를 화장실에 남겨두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다량의 혈흔이 발견되지 않은 이상, 공용화장실의 휴지를 들고 사용하는 과정에서 충분히 소량의 혈흔이 묻을 수 있다는 겁니다. 또 범인의 족적이 현장에서 다수 발견됐는데도 화장실을 드나든 족적은 없다는 점도 이유로 들었습니다.

항소심 "공용화장실 휴지 증거 안 돼" 

번복 전 박씨의 자백도 살인의 증거로 인정되지 않았습니다. 자백 당시의 상황은 이렇습니다. 강도 상해죄로 수원구치소에 구금돼 있던 박씨를 수원서부경찰서 소속 경찰관 3명이 예고 없이 찾아옵니다. DNA 일치 사실을 알았던 경찰은 박씨를 진범으로 의심하고 있었습니다. 박씨는 조사 도중 “나이가 몇인데 인력이나 다니냐는 말을 듣고 격분해 살해했다”고 자백합니다. 하지만 이후 박씨는 “압박감에 자포자기로 허위 자백을 했다”고 번복했습니다.

재판부는 박씨의 손을 들어줬습니다. 재판부는 “박씨는 갑자기 찾아온 경찰관 3명과 사방이 밀폐된 좁은 접견실에서 대면했고 진술거부권이나 변호사를 선임할 권리 등을 고지 받지 못한 채 30분간 추궁을 당했다”고 밝혔습니다.

또 “녹음, 녹화를 할 수 있는 시설이 있는데도 경찰은 이를 이용하지 않았다. 강도 높은 추궁과 회유가 있었다고 봄이 상당하다”고 했습니다.

대법 무죄땐 11년 된 사건 미궁속으로 

항소심 재판부는 다른 증거들 역시 ‘범인은 박씨’라는 것을 증명하지 못한다고 봤습니다. 살인 현장에는 270㎜ 크기의 족적이 발견됐는데, 박씨는 강도 범행 당시 같은 사이즈의 신발을 신었습니다.

그런데 박씨는 “내 신발 사이즈는 280㎜이고, 강도 범행 당시엔 매형의 신발을 하루만 빌려 꺾어 신었다”고 주장했습니다. 법원이 측정한 박씨의 발 크기는 277㎜였습니다. 재판부는 “사건 당일 물류작업을 했던 박씨가 270㎜ 운동화를 신었을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살해 추정 시각(오전 7시~오전 11시)도 박씨의 범행을 뒷받침해주지 못했습니다. 재판부는 “박씨가 이 시각 카페에 머물렀다거나, 제3자가 카페에 들어가지 않았음을 입증할 증거가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2심 재판부는 결국 “박씨가 범인이 아닐 여지가 확실히 배제됐다고 보기 어렵다”고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11년이 지난 지금도 사건은 미궁에 빠져 있습니다. 박씨가 진범인지, 단지 사건 당일 카페에 들렀던 시민인지는 대법원에서 최종 판가름나게 됩니다.

손국희 기자 9ke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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