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대한항공의 분식회계 고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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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대한항공이 증권집단소송 대상 기업 중 처음으로 과거 분식회계 사실을 자진해 공시했다. 이 회사는 2003년 말 대차대조표에서 해외에 주문한 항공기 부품 가운데 실제 도착하지 않은 719억원을 과대 계상했다고 털어놓았다. 이번 고백은 향후 2년간 과거 분식회계를 자진 수정할 경우 집단소송 대상에서 제외시켜 주기로 한 이후 첫 고해성사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다행히 대한항공의 주가는 강보합으로 끝나 금융시장에 별다른 충격을 주지 않았다. 금융감독 당국도 대한항공처럼 과거분식을 자진 공개한 기업에는 감리를 일부 면제해 주는 등 제재조치를 경감해 줄 방침이다. 지난 20일 증권선물위원회는 과거 분식 사실을 밝힌 기아차에 대해 규정보다 두 단계 낮은 '주의'로 징계 수위를 조절한 바 있다.

금융감독 당국은 집단소송 유예가 한시적으로 유예될 뿐 그 이후에는 과거 분식회계에 대해 더 엄정한 조치가 취해질 가능성이 큰 만큼 제2, 제3의 고해성사가 나올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기업들은 여전히 과거 회계 처리 기준 위반 사실을 선뜻 털어놓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집단소송에 따른 부담은 덜었지만 사면이라는 확실한 차단막이 없는 상황에서 형법이나 증권거래법에 따른 민.형사상 책임까지 완전히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번 대한항공 사례에 대한 금융.사법당국의 대응 수위가 다른 기업들의 고해성사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분식회계가 관행처럼 이뤄져 온 상황에서 고의성 없는 분식회계에 대해서는 과감한 사면이 필요하다. 사면이 어렵다면 법률과 현실의 괴리를 감안해 금융.사법 당국이라도 앞장서서 법 적용을 과감히 완화해 주는 것이 바람직하다. 정치자금으로 처벌받은 정치인의 사면까지 거론되는 판에 과거의 관행 때문에 기업의 손발을 묶어 놓아서야 되겠는가. 지금은 내수 회복.투자 확대를 위해 기업들이 공격경영에 나서도 부족한 상황이다. 기업들이 과거 분식을 숨기고 몸조심하느라 방어경영에 급급하도록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