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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 직원 1명이 퇴직연금 맡아 … “원금손실만 안나면 그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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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당신의 퇴직연금 안녕하십니까 <상>

“아직 확정급여(DB)형으로 할지, 확정기여(DC)형으로 할지 결정하지 않았는데 금융회사는 보험사가 될 것이 확정적입니다.” 지난달 22일 서울 마포구 경총회관에서 열린 ‘퇴직연금 운영지원 교육’ 현장에서 만난 G사 경영지원팀 대리는 퇴직연금 도입 계획을 묻자 이렇게 말했다. 왜 은행·증권사가 아닌 보험사인지를 질문하니 이런 답변이 돌아왔다. “저희 회사에 투자금을 맡기려는 고객사들이 있는데 보험사이거든요. 아마 그 보험사 중 한 곳이 될 거예요.”

기업이 운용하는 DB형 실태 #“연금 맡길 금융사 기업이 결정” 53% #수익률 안 따지고 거래은행과 계약도 #원리금보장형 95% … 연 수익 1.6% #전문가 “노사 참여 투자위 설치를”

퇴직연금은 왜 수익률이 낮을까. 그 이유를 찾다 보면 유독 퇴직연금 영역에서는 시장 원리가 잘 작동하지 않는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조금이라도 더 높은 수익률을 좇아 가는 치열한 돈의 움직임이 보이지 않는다. 퇴직연금을 굴려 줄 금융회사 선정부터 그렇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중소기업 J사의 인사담당 부장은 최근 퇴직연금 제도를 도입하기 위해 보험사 2곳과 접촉했지만 거절당했다. 그는 “중소기업이다 보니 금융회사에서 퇴직연금 운용을 귀찮아 하는 것 같다”며 “그냥 기존 거래 관계가 있는 주거래은행으로 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근로자들과 협의를 거쳐 정하는 게 어떻겠느냐는 말에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근로자는 경영자와 담당자가 하고 싶은 방향으로 유도하면 따라오기 마련 아닙니까.”

한국노총의 지난해 11월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퇴직연금 사업자(금융회사) 최종 선정을 사용자 측이 했다는 응답은 53%에 달했다. 선정 기준에 따른 선정(공개입찰 포함)은 28.9%, 근로자(노조)가 결정한 경우는 18.1%에 불과했다.

확정급여형 퇴직연금 수익률이 유독 낮은 것도 시장원리가 먹히지 않음을 드러내준다. 지난해 퇴직연금 수익률은 기업이 적립금을 굴리는 확정급여(DB형·1.59%)가 근로자가 직접 운용하는 확정기여형(DC형·2.54%)보다 낮았다. 근로자 개인보다 기업이 돈을 더 못 굴렸다는 뜻이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이유는 간단하다. DB형은 적립금의 94.6%를 원리금보장형에 묻어두고 있어서다. 2010년대 초반 퇴직연금 가입자 유치전이 치열했던 때는 각 금융회사가 DB형 예금금리를 6~8%까지 제시하며 ‘출혈경쟁’을 벌인 적도 있다. 하지만 이제는 유치 열기가 꺾인 데다 시장금리마저 떨어지면서 해마다 퇴직연금 예금상품 금리가 떨어지는 추세다. 물론 DB형 수익률이 낮은 건 근로자가 아닌 기업이 걱정할 일이다. 근로자는 설사 DB형 수익률이 마이너스더라도 퇴직할 땐 ‘30일분 평균 임금×근속 연수’에 해당하는 금액을 퇴직급여로 받을 수 있다. 대신 기업엔 적잖은 부담이다. 만약 매년 근로자 임금이 평균 3% 올랐는데, DB형 퇴직연금 수익률은 1~2%에 불과하다면 기업으로서는 그 차이만큼을 기업 돈으로 메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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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용 한국경영자총협회 사회정책팀장은 “기업 입장에선 원금 손실이 생기면 ‘퇴직금도 못 주는 회사’로 낙인 찍힐까 두려워 ‘손해만 나지 않으면 된다’며 이자만 보전받는 선에서 만족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대기업이면 금융회사에서도 신경 써서 관리해 주겠지만 중소기업은 직원 한 사람이 인사·재무 등 이것저것 다 하는 데다 금융회사도 관심이 없다”고 덧붙였다.

퇴직연금 시장에 치열한 수익률 경쟁을 불러일으키려면 기업과 근로자 모두의 관심과 참여가 답이다. 류건식 보험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이를 위해 퇴직연금 투자위원회 설치를 제안한다. 그는 “지금은 각 회사 퇴직연금 운용 담당자가 혼자만의 판단으로 주식 등에 투자했다가 모든 책임을 떠안게 될까 봐 실적배당형 상품에 투자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한애란 기자 aeyan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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