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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했지만 떳떳했던 내 부모, 난 자식에게 어떤 모습일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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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송미옥의 살다보면(2) 

남편을 떠나 보내고 고택과 작은도서관을 관리하며 평범한 할머니로 지낸다. 지식은 책이나 그것을 갖춘 이에게서 배우는 것이지만, 인생살이 지혜를 배우는 건 누구든 상관없다는 지론을 편다. 경험에서 터득한 인생을 함께 나누고자 가슴 가득한 사랑·한·기쁨·즐거움·슬픔의 감정을 풀어내는 이야기를 쓴다. 과거는 억만금을 줘도 바꿀 수 없지만, 미래는 바꿀 수 있다는 말처럼 이웃과 함께 남은 인생을 멋지게 꾸며 살아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8살, 6살, 4살짜리 아이가 셋인 딸은 하루가 25시다.
옛날 생각 하면 청소기가 청소해주고 밥통이 밥해주고 세탁기가 세탁해주는 세상인데 뭐가 그리 바쁠까 싶지만, 옛날이야기를 하는 나만 구식 할머니가 된다. 그래서 입을 다물고 그 삶에 들어가 보면 정말로 정신이 하나도 없다. 둘과 셋의 차이는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엇이다.

하루는 1번(첫째 딸)의 병원 진료를 위해 일찍 어린이집에 들러 내가 1번을 데리고 나오고 2번과 3번의 퇴근(?)을 딸이 맡았다. 볼일을 마치고 딸 집에 돌아오니 아이들이 어린이집에서 점심시간에 배급받는 개인 식판이 싱크대 위에 그대로 있었다. '오늘은 점심을 원에서 안 먹는 날인가?' '큰 가방에 달랑 식판 하나 넣어 다니는데 빈 가방을 매 보냈단 말인가?' '애들이 식판 없어 밥을 못 타 먹은 건 아닌가?' '세 놈 모두 굶어…?'

딸 집에 오니 아이들의 어린이집 개인 식판이 싱크대 위에 그대로 있었다. 아이들 모두 밥을 굶었을까봐 가슴이 답답해졌다. [중앙포토]

딸 집에 오니 아이들의 어린이집 개인 식판이 싱크대 위에 그대로 있었다. 아이들 모두 밥을 굶었을까봐 가슴이 답답해졌다. [중앙포토]

이런저런 상상에 가슴이 답답해 다른 어린이집에 근무하는 여동생에게 전화하니 “호호호~ 할머니, 걱정 안 해도 돼요. 여벌 식판이 있어서 안 굶겨요.” 대신 아이들이 "누구누구는 식판이 없대요" 하며 선생님에게 신고하느라 난리란다.

딸과 아이들이 5시에 모두 귀가했다. 딸에게 슬쩍 물으니 아침에 너무 정신이 없어 다 챙겨 넣은 줄 알았는데 어린이집에 다 보내고 돌아와 보니 식판이 그대로 있더란다. "괜찮아, 엄마. 아직 어려서 아무것도 몰라" 한다. "어이구~ 아이를 안 잃어버리고 오는 것만으로도 대견하다"며 빈정거렸다.

그런데 아직 어려서 아무것도 모른다던 그놈들이 생각이 있었다. 1번은 아무 말도 안 하는데 2번(둘째 아들)이 엄마를 앉히며 제 말을 들어보란다.

6살 둘째의 훈계에 엄마 무릎 

"엄마, 제 말 좀 들어 보세요. 오늘 엄마가 식판을 안 챙겨줘서 어린이집에 있는 식판에다 점심을 받아먹었고 친구들이 모두 '얼레리 꼴레리~' 하며 놀렸지만 안 싸우고 꾹 참았어요. 왜냐하면 내가 식판이 없었으니까(이 대목에선 제법 어른스러웠다)." 그러면서 "다음부터 엄마가 정신을 똑똑히 차리고 기억하세요. 알겠지요?" 하며 훈계를 한다.

정신이 뭔지나 알고 하는 말인지 웃음이 나왔지만 참았다. 그다음이 더 가관이다. 그 말이 끝나니 당황한 딸이 무릎을 꿇고는 “미안해…. 그래서 친구들이 많이 놀렸구나. 다음부턴 그런 일 없게 정신을 똑바로 차릴게" 하면서 사과하는 의미로 사달라고도 안 한 장난감을 사준단다.

어린시절 고구마로 아침을 때우고 십 리 길을 걸어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선생님이 육성회비를 안 냈다고 회초리로 혼내면서 돈 갖고 오라고 집으로 돌려보내진 친구 이야기가 생각났다. [일러스트=중앙DB]

어린시절 고구마로 아침을 때우고 십 리 길을 걸어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선생님이 육성회비를 안 냈다고 회초리로 혼내면서 돈 갖고 오라고 집으로 돌려보내진 친구 이야기가 생각났다. [일러스트=중앙DB]

그 꼴이 우습기도 하고 서글프기도 했다. 언젠가 읽은 지인의 수필집 속 이야기가 생각났다. 도시락은커녕 집에서도 고구마로 아침을 때우고 십 리 길을 걸어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교무실로 불려갔더란다. 선생님이 육성회비를 안 냈다고 회초리로 혼내면서 돈 갖고 오라고 집으로 돌려보냈는데 집에 간들 돈이 없는 걸 알지만, 딱히 갈 데는 없고 해서 터덜터덜 걸어 집에 도착하니 아무도 없었다.

강 건너 밭에 계실 엄마를 보러 밭으로 가는 길. 내 친구는 강섶에 앉혀놓고 그의 엄마만 물을 건너 밭을 매시며 한 번씩 크게 이름만 불러 자식이 잘 있나 없나를 확인하던 그 강을 이젠 건너갈 수 있을 만큼 컸다는 생각에 발을 담그는 순간 엄마가 이름을 부르며 달려오더란다.

아침에 보고도 또 그리운 엄마. 다짜고짜 나를 잡고는 손에 든 고추작대기로 마구 때렸단다. 학생이 공부나 하지 왜 집구석에 기어 오냐며 말이다. 도망치듯 다시 십 리 길을 걸어 학교로 가서도 또 혼이 나곤 했다.

하지만 나이 들어보니 혼났던 생각보다 그때 엄마도 육성회비 가져오라고 학교에서 보낸 걸 아시고는 돈 없는 미안함은 말씀 안 하시고 고추작대기로 뒈지게 패고 돌려보낸 뒤 혼자서 애가 타고 서러워 엉엉 우셨을 거라고…. 다음날 아무 말씀 안 드렸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꼬깃꼬깃 접은 돈을 육성회비 내라며 책보에 꼭꼭 넣어주던 엄마의 모습이 너무 절절하게 생각난다는 거다.

아무튼 모든 걸 충족해주고도 절절매는 요즘 엄마들과 그 옛날 하나도 충족시켜 줄 수 없었지만, 삶이 떳떳했던 우리 부모의 모습이 왜 대조적으로 생각나는지 그리고 그 삶의 굴레에 낀 나는 내 자식들에게 또 어떤 모습으로 기억될지 마음이 뒤숭숭한 하루였다.

송미옥 작은도서관 관리실장 sesu323@hanmail.net

비트코인의 탄생과 정체를 파헤치는 세계 최초의 소설. 금~일 주말동안 매일 1회분 중앙일보 더,오래에서 연재합니다. 웹소설 비트코인 사이트 (http:www.joongang.co.kr/issueSeries/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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