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체험·미체험세대가 본 분단극복의 길 (정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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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동족상잔의 비극」6·25전쟁이 끝난지 35년이 지났다. 6·25는「분단의 굴레」를 우리 민족가슴속 깊이 더욱 내면화시켰다. 그러나「분단의 굴레」는 벗어버리지 않으면 안되는 일이다. 현재 우리 사회에는 6·25를 청장년기에 겪은 세대도, 6·25에 대해 어렴풋한 기억만을 가진 세대도, 6·25를 전혀 겪어보지 않은 세대도 함께 일정한 사회적 발언권을 행사하면서 공존하고 있다. 분단극복의 문제는 일차적으로 우리 사회내부의 공통된 합의를 형성하는 과제를 제기하고있다. 공통된 합의를 이루는데 도움이 되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이 정담을 마련했다. 정담에 참석한 사람은 6·25를 참전 군인으로 몸소 체험했던 성균관대 양흥모교수(63)와 6·25당시 국민학생이었던 소설가 김원일씨(46), 6·25를 전혀 체험하지 않은 서이종씨(28·역사문제연구소 연구원)다. 【편집자주】
양=6·25는 공산주의와 자유민주주의의 대립인 동시에 동족상잔의 남북전쟁, 제한된 국지전이며 세계사적으로는 UN의 전쟁이라는 성격을 지닙니다. 해방이후 6·25까지 우리민족의 무수한 통일노력은 주로 소련에 의해 좌절되었읍니다.
6·25는 분명히「스탈린」의 사주에 의한 김일성의 기습남침입니다.
김=미·소가 분할점령을 하지 않았더라도 쉽사리 통일이 되었을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읍니다. 이미 1920년대에 우리나라는 좌·우의 대립이 형성됐고 해방이후의 우리사회 모델로 공산주의와 자유주의의 주도권 쟁탈전은 어떤 형태로든 있었을 것입니다.
이점에서 6·25는 외세에 의한 강제분단전쟁이며 동시에 내란의 성격도 가진다고 봅니다. 6·25는 미·소에 의해 중도좌파·중도우파·국내파가 모두 제거된 상태에서 극렬한 이념을 양측으로부터 도입한 두 강경파의 대립이었다는 점에서 더욱 비극적입니다.
김=체험으로볼때 남침 만큼은 분명합니다.
최근 일부 젊은학자들 사이의 남침유도설은 북한의 전쟁준비사실을 막강한 정보력을 지닌 미국이 몰랐을리가 없는데 6·25직전 군대를 철수시켰던 사실, 또 미국이 남아도는 군수물자를 소비해야할 장소를 찾았다는 주장, 이승만대통령의 북진통일론, 장개석과 이승만대통령의 진해회담에서 장개석이 자국의 안전을 도모할 의도에서 이승만대통령에게 전쟁을 일으킬 것을 종용했다는 설등을 내용으로 합니다.
그러나 당시 소련도 이미 북한에서 철수했었고 남한에서도 여순사건·대구폭동·제주4·3사건등을 거쳐 좌익세력의 뿌리가 뽑힌 상대여서 미국은 주둔군을 철수하더라도 별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6·25직전 5월위기설·6월위기설 등이 있었지만 믿는 사람은 많지 않았으니까요.
서=6·25를 볼때 남침이냐 북침이냐를 가리는 것이 큰 쟁점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6·25의 양면성, 즉 국내전인 동시에 국제전이라는 성격을 우리의 입장에서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가 중요합니다. 해방직후부터 우리사회에는 무수한 통일노력이 시도되었으나 모두 실패했읍니다. 예컨대 건국준비위원회의 통일정부수립노력은 주목할 정도였읍니다.
6·25는 이같은 무수한 통일노력들이 좌절되고 나머지 마지막 선택으로서 나타난 전쟁이라고 봅니다.
양=통일자체는 어떤 형태로 이루어지든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전제가 있읍니다. 모든 가치관이 용인되는 사회로의 통일이어야 합니다. 공산주의의 문제점은 여기에 있읍니다. 기본적으로 계급투쟁의 유물사관에서는 적대계급을 타도하려는 목적을 강하게 편지합니다.
그 결과 민족·가족사이에도 싸움을 일으키게 합니다. 6·25는 2백만의 동포가 희생된 전쟁입니다. 이럴수는 없는 일입니다. 김일성의 전쟁책임은 역사에 의해 심판받아야 합니다.
김=제가 보기에 비극의 책임은 극단주의에 있읍니다. 극우와 극좌에 서있는 사람들에 의해 분단의 정도가 심해졌고 비극도 확대되었읍니다.
실제로 6·25당시 전투중에 죽은 사람보다 처형과 반처형의 순환에 의해 죽은 사람이 더욱 많습니다. 결국 당시 민중들은 극좌·극우세력들에 끌려 다니면서 희생을 당한 것입니다.
서=극단주의가 비극을 크게 했다는 의견에 동의합니다. 해방직후 우리사회에는 극단주의의 대립은 그다지 심각하지 않았읍니다. 예컨대 건준은 좌·우가 동수로 구성돼 통일을 제일목표로 내세웠었읍니다.
이것이 미·소의 신탁통치 논의를 거치면서 깨지고 이후 극단주의자들이 득세합니다. 당시 사회가 직면한 과제로부터 문제를 보면 좌·우대립은 작아 통일가능성이 엄존했었는데 이것이 미·소에 의해 깨지고 극단주의가 강화된 것입니다.
양=최근 학생들의 통일논의에 대해 염려되는바가 큽니다. 제가 보기에 북한의 통일철학은 계급투쟁을 전제로 한 유물사관에 근거하고 있읍니다. 그들은 절대로 혁명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이때문에 한편으로는 평화적인 제스처를 쓰면서 땅굴도 파고 KAL기폭파도 하는 것입니다. 결국 북쪽의 통일철학이 바뀌기 전에는 평화통일은 불가능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무턱대고 학생회담을 하자는 것은 너무 순진한 생각입니다.
최근 국제정세가 중공도 소련도 모두 긴장완화의 추세로 돌아섰읍니다. 북한도 예외일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통일논의도 진전이 되겠지요.
김=분단극복에 대한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이제까지 남북대화는 양쪽이 자체정권안보를 위해 이데올로기를 이용하는 차원을 넘지 못했읍니다. 서로 들어줄수 없는 요구를 상대방에게 강요해온 것이지요.
이제 남한은 GNP와 인구등 모든면에서 북한보다 앞서고 있읍니다. 이런 상황에서 앞으로는 좀더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합니다. 국가보안법·반공법개정등 통일논의를 개방하는 조치를 취해 논의를 활성화하면 대립은 해소될것입니다. 그러나 학생들의 판문점회담은 너무 급작스러운 것이어서 불안을 야기했읍니다. 단계적으로 논의의 개방을 거치면서 남북교류를 늘려나가면 통일에 접근할수있을겁니다.
서=학생들의 6·10회담 주장이 통일논의의 활성화에 기여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면이 있읍니다.
김=학생들의 올림픽공동개최주장은 이미 시기적으로 늦었읍니다. 현재는 올림픽이후의 긴장완화대책에 대해 논의할 시기입니다.
서=학생들의 통일논의제기는 통일의 전제조건으로 민주화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효과가 있기도 합니다.
김=국회가 통일논의를 올바르게 수렴해야지요.
양=6·25에 대한 연구는 더욱 진척되어야합니다. 지식인은「독단으로는 대화도 화합도 없다」는 인식하에 온건하고 중도적 입장에서 자유민주주의체제를 강화하는데 기여했으면 좋겠읍니다.
김=제가 생각하기에 6·25의 교훈은 첫째, 이런 전쟁은 다시 없어야 한다는것. 둘째, 전 쟁으로부터 비롯된 온갖폭력, 예컨대 고문같은것은 청산되어야 합니다. 세째로 6·25는 사람만 우리민족이고 옷도 무기도 모두 외제를 갖고 싸운것입니다. 즉 민족자주성의 확립이 중요한것이지요. 네째로 통일논의에 있어 성급한 감정적 논의는 자제해야 합니다. 이성적으로 넓은 시야에서 논의를 해야 하지요.
서=기존의 6·25에 대한 인식은 전쟁의 참상에만 시선이 쓸려 있는듯합니다. 물론 참상의 교훈을 잊으면 안됩니다. 그러나 이제 6·25는 참상으로만 환원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전쟁의 내용에 주목해 그로부터 교훈을 이끌어내고 그것들을 오늘의 통일논의에 밑거름이 되도록 해야합니다. <정리=강영진기자>

<참석자>
양 흥 모

<성균관대 교수>
김 원 일

<소설가>
서 이 종

<역사문제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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