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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이익의 균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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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서경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서경호 논설위원

서경호 논설위원

자유무역협정(FTA)을 얘기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말이 ‘이익의 균형’이다. 특히 한·미 FTA처럼 민감한 협상에선 국내 이해관계자를 설득하고 국회 비준 등 이행 절차를 밟아야 하는 만큼 이익 균형이 더 중요하다. 14개월의 협상 끝에 2007년 한·미 FTA 원협정이 타결됐지만 2012년 3월 실제 발효되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추가 협상과 2010년 FTA 재협상 타결이라는 험준한 고개를 넘어야 했고, 2011년 말 최루탄이 터진 국회에서 비준 절차를 밟아야 했다.

강대국과의 양자 협상은 힘겨웠다. 협상을 거듭할수록 원협정의 이익 균형은 조금씩 무너졌다. 2010년 재협상이 타결됐을 때 중앙일보 1면 톱 제목이 ‘더 주고 덜 받았다…동맹 때문에’였다. 당시 한·미 FTA 폐기를 주장하던 민주당 지도부가 본지 1면을 들고 기자회견을 하며 여론전의 도구로 써먹었다. 경제효과가 원협정보다 연간 400억원 넘게 줄어든다고 정부가 분석할 정도였으니 분위기가 좋을 리 없었다. “그래도 FTA 안 하는 것보다는 낫다”는 대다수 전문가의 평가에도 불구하고 야당 반발은 거셌다. 김종훈 당시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장은 “협상보다 더 오랜 시간 우리 내부의 이견을 설득하고 편견과 싸워야 했다. 누군가 나를 옷만 바꿔 입은 이완용, 미국의 총독이라며 모욕하는 순간도 참아야 했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한·미 FTA의 디딤돌을 놓은 것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다. 야당 정치인 시절,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쉬운 대로 안줏거리처럼’ 세계무역기구(WTO)·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을 반대했지만 대통령 노무현은 더 큰 정치인이었다. FTA 아이디어를 낸 것도 체결한 것도 노무현 정부였다. 노 전 대통령은 FTA에 반대하는 진보를 향해 이렇게 일갈했다. “역사적 사실을 존중하라. 진보주의자들이 개방과 관련해 주장했던 내용이 그 이후 사실로 증명된 게 하나도 없다. 공허하고 교조적인 이론에 매몰돼 흘러간 노래만 계속 부르지 마라.”

한국에서 ‘나쁜 협상’ 소리를 듣던 한·미 FTA에 대한 불만이 오히려 미국에서 터져 나오더니 결국 재협상에 이르렀다. 노무현 정부는 FTA 홍보를 위해 “토끼는 한 평의 풀밭으로 만족하겠지만 사자는 넓은 초원이 필요하다”는 비유를 하곤 했다. 우리가 사자인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진짜 사자였다. 어제 FTA 발표를 하면서 정부 누구도 ‘이익의 균형’을 감히 말하지 않았다.

서경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