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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진실의 순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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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이현상 논설위원

이현상 논설위원

‘진실의 순간’(the moment of truth)은 본래 투우 용어다. 소와 조연 투우사 간의 실랑이 끝에 주연 검투사(마타도르)가 등장, 소의 심장에 최후의 검을 찔러 넣는다. 삶과 죽음이 부닥치는 순간이다. 2008년 미국 폭스TV가 개발한 리얼리티 쇼 제목이기도 하다. 출연자는 거짓말 탐지기에 걸리지 않고 21개의 질문에 답해내면 50만 달러를 받는다. “마약을 해봤나” “혼외정사를 한 적 있느냐” 같은 거북한 질문 앞에 진실된 답을 내놓기는 쉽지 않다.

트럼프 미 대통령이 마이크 폼페이오와 존 볼턴 같은 강경파를 국무장관과 안보보좌관에 앉히자 북핵 문제가 이제 ‘진실의 순간’에 맞닥뜨리게 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남북, 북·미 정상회담이 축복이 아니라 재앙이 될 수도 있다는 긴장감마저 돈다. 특히 네오콘의 대표 주자로, 북핵 해결을 위해 폭격까지 주장했던 볼턴의 기용은 예사롭지 않다.

볼턴은 공격적이고 직설적인 언행으로 악명 높다. 2005년 부시 대통령이 그를 유엔대사로 지명했을 때 민주당은 물론 공화당에서도 반대가 나왔다. ‘윗사람에게는 아부 떨고 아래는 괴롭히는 자(kiss-up, kick-down)’라는 인신공격성 평까지 등장했다. 부시는 결국 인준을 포기하고 의회 휴회 중 임명하는 방법을 썼다. 6자회담 대표로 있던 2003년 서울에서 행한 한 강연에서는 김정일의 이름을 41차례나 거론하면서 “폭압적인 독재자”로 맹비난했다. 당시 허버드 주한대사가 “대화 국면인데 좀 순화해달라”고 요청했으나 싹 무시했다. 결국 “인간 쓰레기이자 흡혈귀”라는 북한의 반발로 대표단에서 제외됐다. 보좌관 지명 후 볼턴은 “과거 발언들은 지나간 일이며 중요한 것은 대통령의 말”이라며 자중하겠다는 뜻을 밝히긴 했다. 이럴 땐 ‘윗사람에게 아부 떠는’ 성격이 그나마 다행이려나.

볼턴의 등장에 청와대는 긴장하고 있지만, 그가 노무현 정부 때 한국 외교의 체면을 살려준 적도 있다. 2006년 유엔 사무총장에 출마한 반기문을 놓고 안전보장이사회 15개 이사국이 실시한 예비투표에서 주인 모를 반대 한 표가 나왔다. 거부권을 가진 상임이사국의 표라면 낭패인 상황. 이때 볼턴은 일본을 의심하고서 넌지시 ‘압력’을 가했다. 다음 예비투표에서 반대표는 기권으로 바뀌었다. 그의 회고록 『항복은 선택지가 아니다』에서 소개한 일화다. 한·미 공조를 위해선 억지로라도 이런 인연을 찾아야 할 만큼 ‘진실의 순간’은 절박하다. 과연 북한은 진실의 순간에 제대로 된 답을 내놓을 것인가.

이현상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