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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배명복 칼럼

궁하면 통하고, 통하면 오래 간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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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배명복
배명복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배명복 칼럼니스트·대기자

배명복 칼럼니스트·대기자

‘물극필반(物極必反)’이다. 극단에 이르면 반드시 뒤집힌다는 세상사의 이치 말이다. 한 달 후면 판문점에서 남북 정상이 만난다. 북한 비핵화를 의제로 다루는 최초의 남북 정상회담이다. 다음주에는 우리 예술인들의 평양 공연이 펼쳐진다. 가수 싸이의 합류가 성사된다면 평양 한복판에서 말춤 율동 속에 ‘강남스타일’이 울려 퍼지는 초현실적 장면이 현실이 될 수 있다. 몇 달 전만 해도 상상조차 못 했던 일이다.

북·미 비핵화 합의해도 #뿌리 깊은 상호 불신 탓에 #사찰과 검증 벽 부닥칠 것 #다음달 남북 정상회담으로 #신뢰의 초석 놓아야

평창올림픽 종료와 함께 한·미 연합훈련이 시작되면 북한은 핵과 미사일 도발을 재개한다. 이에 맞선 트럼프의 시범적 선제타격으로 김정은의 코피가 터지면 한반도의 전쟁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된다. 그게 불과 수개월 전의 지배적 전망이었다. 북한의 평창올림픽 참가를 계기로 남북이 극적인 평화외교에 나서면서 예측은 완전히 빗나갔다. 김정은이 연합훈련 재개를 수용하고, 핵과 미사일 도발을 유예하고, 북·미 정상회담을 통해 비핵화 협상에 나설 뜻을 밝힐 것으로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때때로 현실은 상상을 초월한다.

지난주 서울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리더십네트워크(APLN) 동북아지역회의에 참석했다. 한국을 비롯해 중국·일본·몽골 등에서 온 회원들이 모여 핵 비확산과 군축을 논의하는 자리다. 당연히 논의는 전기(轉機)를 맞은 북핵 문제에 집중됐다. 참석자들은 평창올림픽으로 조성된 평화의 모멘텀을 살려 남북관계 개선과 북핵 문제 해결의 돌파구를 연 문재인 정부의 외교력을 높이 평가했다. 하지만 결과를 낙관하긴 힘들다는 신중론이 압도했다.

미국이 북한에 요구하는 것은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비핵화(CVID)’다. 현실적으로 이게 가능할지에 대해서는 대다수 참석자가 회의적이었다. 1980년대 이후 관측된 북한발(發) 지진파만 6000건이 넘는다. 대부분 터널 굴착용 발파로 인한 지진파로 추정된다. 북한이 핵무기나 미사일 및 관련 시설을 은닉할 가능성을 고려하면 수천 개에 달하는 북한 내 모든 갱도와 지하시설을 사찰해야 한다. 일반 공장이나 군사시설로 위장된 핵·미사일 관련 시설도 수없이 많다. 이 모든 곳을 사찰팀이 일일이 다 뒤지고 다니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트럼프와 김정은이 북한 비핵화에 합의하더라도 결국은 사찰과 검증이라는 벽에 부닥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배명복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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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의 이란 핵합의 파기 위협도 북핵 협상에 암초로 지적됐다. 트럼프는 5월 12일까지 유럽연합(EU)이 이란 핵합의의 문제점을 시정하지 않으면 재승인을 거부하겠다는 입장이다. 이란 핵합의 반대론자인 마이크 폼페이오 중앙정보국(CIA) 국장과 존 볼턴 전 유엔대표부 대사가 각각 국무장관과 국가안보보좌관으로 트럼프팀에 합류하면서 이란 핵합의 파기 가능성은 한층 커졌다. 이란 핵합의가 깨지는 걸 보면서도 김정은이 트럼프와 진지하게 협상에 나설지 의문이다. 미국이 합의를 파기할 가능성에 대비한 ‘보험(hedging)’ 차원에서 핵무기나 핵 프로그램 일부를 숨길 가능성도 있다.

미국은 미국대로 북한을 믿지 못한다. 북한의 ‘속임수(cheating)’를 막기 위해 가장 강력하고 공격적인 사찰을 요구할 게 뻔하다. 결국 사찰과 검증 문제를 놓고 미국과 북한이 밀고 당기다 합의가 깨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북·미 간 불신의 벽은 하늘처럼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짓말처럼 주어진 이 절호의 기회를 살려 최대한 갈 수 있는 데까지 가봐야 한다는 게 참석자들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4월 말 남북 정상회담은 그래서 중요하다. 성실하고 정직한 중재자 역할을 통해 문 대통령은 북·미 간 불신의 벽을 낮춰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김정은의 비핵화 의지를 남북 정상 간 합의문에 반영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비핵화 이후 전개될 북한의 미래에 대한 원대한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핵을 포기하고 베트남처럼 개혁·개방의 길로 갈 경우 경제 발전은 물론이고 체제의 안전도 도모할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줘야 한다. 이를 통해 문 대통령은 북·미 정상회담으로 가는 길을 다지면서 북핵 문제의 궁극적 해결에 필요한 북·미 간 신뢰의 초석을 놓아야 한다.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한다. 즉 ‘궁즉통(窮卽通)’은 주역의 이치 중 하나다. 궁하기는 남북한이나 미국이나 마찬가지다. 북한은 체제를 살려야 하고, 한국은 전쟁을 막아야 한다. 미국은 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이 본토를 타격할 가능성을 제거해야 한다. ‘통하면 오래 간다’는 ‘통즉구(通卽久)’는 주역의 또 다른 가르침이다. 남한·북한·미국 3자가 통한다면 항구적 평화를 향한 한반도의 대변혁이 불가능한 꿈은 아니다.

배명복 칼럼니스트·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