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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권복규의 의료와 세상

연명의료 유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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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권복규 이화여대 의대 교수

권복규 이화여대 의대 교수

우리나라 병원에서는 환자의 상태가 위중할 경우 보호자나 의사나 모두 이를 솔직하게 환자 본인에게 알리기를 꺼린다. 의사는 보호자에게, 보호자는 의사에게 미룬다. 회생 가능성이 없는 말기 환자에게 현재의 상태를 솔직하게 설명하고, 연명의료 시행 여부를 묻는 ‘사전의료의향서’를 받기가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환자의 의식이 오락가락해서 도저히 판단을 내릴 수 없을 때는 가족에게 연명의료 여부에 대한 결정을 맡겨야 하는데, 가족들의 의견이 모두 일치하는 것도 아니다. 대개 더는 치료방법이 없어 집에서 연명하다가 숨이 끊어질 때쯤 119를 불러 응급실로 내원하는 게 일반적이다. 이처럼 시급을 다투는 상황에서 환자의 사전의료의향서가 있는지 따지기도 어렵고, 가족들 또한 경황이 없어 무슨 결정을 내리기도 쉽지 않다.

의료와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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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다 보니 지난 2월 시행된 ‘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결정에 관한 법률(연명의료결정법)’이 실제 의료현장에서 큰 혼란을 일으키고 있다. 법에 따르면 사전의료의향서는 보건복지부가 지정한 ‘등록기관’을 통해 작성해 ‘연명의료정보시스템’에 보관해야만 법적 효력이 발휘된다. 또 환자의 의사가 불분명할 때는 가족 전원의 합의가 있어야 연명의료를 중단할 수 있다.

환자의 회생 가능성을 의사가 판단하고 그의 뜻에 따라 불필요한 치료를 중단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고 의업의 오랜 관행이다. 그런데 이런 의사의 행위와 보호자의 의도 등에 대한 의구심이 생기면서 의료의 중요한 관행 하나를 복잡한 절차와 처벌이 따를 수 있는 번거로운 제도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불필요한 연명의료를 유보해 임종하는 환자의 존엄을 지키겠다는 이 법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환자에게 있는 상황을 솔직히 이야기할 수 있도록 의료문화가 바뀌어야 한다. 또 의사의 진단을 신뢰하는 문화가 정착돼야 한다. 모두가 가는 삶의 마지막 길을 좀 편히 가고자 만든 제도가 경직된 절차로 인해 연명의료를 지속하는 결과를 빚는다면, 참 아이러니컬한 일 아닌가.

◆약력

서울대 의대 졸, 의학 박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철학 박사. 저서 『의료윤리교육방법론』『생명윤리 이야기』등.

권복규 이화여대 의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