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아(琴兒) 피천득(96) 선생은 영문학자.수필가.시인으로 우리 시대 최고의 원로 문인이다. 그의 시문에는 읽어서 모를 말이 없어 해설이 필요 없다. 그러나 분명한 건 선생 특유의 절제된 언어와 정서의 여유, 감동과 여운이 있다는 사실이다.
'꽃씨와 도둑'이란 시를 보자. '마당에 꽃이/많이 피었구나//방에는/책들만 있구나//가을에 와서/꽃씨나 가져가야지'. 친구 공부방에 들른 나. 친구는 없고, 마당 가득 핀 꽃들이 눈에 들어온다. 차마 책은 못 훔치겠고, 훗날 꽃씨나 가져갈까 혼자 중얼거린다. 간결한 아름다움이 시구마다 빛난다. 이와 같은 간결미는 시조와의 오랜 인연에서 비롯된 것이다.
1925년 이은상과 알게 되면서부터 선생은 3장 6구에 사랑과 그리움의 서정을 담아왔다. '진달래'도 그때 작품이다. 함께 눈을 맞으며 오르던 산에 혼자 올라 곱게 핀 진달래를 본다. '봄이 오면' 오마 하고, 새끼손가락 건 임은 진달래 피어도 오지 않는다. 그리하여 '진달래가 피었소' 하고, 없는 임을 부르는 것이다. 예의 어려운 데 없이 환히 들어오는 작품이다.
선생의 '서정시집'에 실린 18수의 연시조 '금아연가'마지막 수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훗날 잊혀지면 생각하려 아니하리/이따금 생각나면 잊으려도 아니하리/어디서 다시 만나면 잘 사는가 하리라.' '백합같이 시들어가는 아사코'와의 '헤지지 않아도 되었을' 마지막 이별을 노래하는 듯하여 자꾸 돌아보게 된다.
홍성란 <시조시인>시조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