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2)주섭일특파원 취재기|보트카로 나눈 크렘린궁의 축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3면

크템린대궁전은 제정러시아와 사회주의초강대국 소련이라는 두개의 얼굴을 보여준다. 아직도 러시아의 잔영이 짙은 겉보기에는 3층 건물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2층이며, 일반적으로 크렘린궁이라 부른다. 지금 미-소정상회담의 주무대가 이곳으로 소련이 외빈을 맞고 모든 외교행사를 치를 만큼 자랑스러운 명소. 그러나 일반관람은 금지되어 있다.

<러시아잔영 물씬>
이궁은 1837년부터 11년동안 「콘스탄틴·톤」의 설계로 11년만에 준공되었다. 제정러시아시대 차르(제정러시아 황제호칭)와 그 가족들이 모스크바 나들이 할때면 반드시 이궁l층에 숙박했다고 한다.
혁명후 소련최고간부회의와 공산당 중앙위원회가 이곳에서 열리는 것은 구체제의 황거를 상기할때 묘한 역사의 아이러니를 느끼게 한다.
이같은 회의가 열릴 때마다 지붕위에 적기가 계양된다고 한다. 이 궁의 최대명물이 바로 성게오르기홀이다. 차르가 러시아귀족들을 초청, 호화로운 대무도회를 열었던 곳이며,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등에 나오는 무도회장면이 바로 이 홀이라는 것이다.
10월혁명후 이 홀의 기능은 완전히 바뀌었다. 소련정부는 1945년 나치독일에 대한 전승기념식을, 1961년 세계최초의 우주인 「유리·가가린」의 영웅훈장수여식을 이곳에서 거행했다. 「고르바초프」서기장은 지난달 29일 바로 이 홀에서「레이건」미대통령을 영접했다. 이 장면은 한국TV도 방영, 서울에서도 샹들리에등 화려한 장식들을 누구나 볼수있었다.
우리일행은 오른쪽으로 꺾어 금장식문을 통과, 홀에 들어섰다. 카스피해의 철갑상어알젓(캐비아)등 러시아음식과 보트카등 음료가 긴 탁자위에 가득 차려져 있다. 2백여명의 초청객들이 벌써 기다리며 대화를 나누고 있다. 맨오른쪽에 마련된 귀빈석에는 인터액션 카운슬 정회원만 들어갔다. 신현호전총리는 「슈미트」의장 (전서독수상)일행과 함께 그곳으로 들어갔다. l백여명의 기자들이 그 맞은편 15m콤 떨어져 몰려있었다. 기자도 이들속에 들어가 취재준비를 했다. 우리들은 「그로미코」최고회의간부회의 의장부처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잔칫집의 외토리>
그사이 다른나라 대표들은 그들의 모스크바주재 외교관들과 반갑게 만나 악수를 나누었다. 어떤 사람들은 얼싸안고 입맞춤까지 한다. 그러나 한국대표들은 외토리 신세였다. 우리들을 반겨줄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이다. 마치 잔칫집에 버려진 미아가 된듯이 외롭게 서있을수 밖에 없었다. 기자도 행여나하고 두리번거렸으나 낯익은 사람은 한사람도 없었다.『여기가 어딘데…』라고 생각하는 순간 긴장감이 등골을 타고 내린다.
초청받을줄 알았던 북한외교관도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이번회의 참가국 외교관들만 초청한것 같다.
오후3시10분, 기자석 오른쪽 큰문이 열리고 「그로미코」부처가 입장했다.
카메라 플래시가 한꺼번에 터진다. 기자도 셔터를 눌렀다.「그로미코」는 짙은 회색양복차림의 온화하면서도 세련된 할아버지같다. 외교관 출신답게 많은 외교관들을 잘아는듯 먼저 외교관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그를 뒤따르는 「리디아·드미트리에브나·그로미코」여사는 핑크색줄무늬 원피스에 단발머리탓인지 매우 젊게 보였다. 기자가 근접해 본 소련국가원수부처는 모스크바거리어디서나 흔히 볼수 있는 러시아의 보통부부같았다.
이들은 귀빈석중앙에서 「슈미트」와 「후쿠다」에게 차례로 인사를 나누었다. 곧이어 「그로미코」의장은 검은테 안경을 끼고 10분간 환영사를 낭독.
그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인터액션 카운슬회의의 모스크바개최를 환영하면서 소련정부는 페레스트로이카정책을 계속 추진한다고 밝혔다. 「슈미트」는 답사를 통해 소련의 개혁·개방정책이 동서화해에 큰기여를 할것이라고 찬사를 보냈다. 「그로미코」가 축배를 선도하자 만장의 초청객들은 모두 보트카를 한잔씩 마셨다.
한국대표들은 신전총리가 「그로미코」와 인사하는 모습을 멀리서나마 감격스럽게 지켜보았다. 신전총리는 「그로미코」의장에게 『한국에서온 신현호전총리』라고 자기소개한후 그와 정중히 악수했다. 「그로미코」의 표정은 담담한것 갈았고, 한마디의 말도 자제하는듯 했다. 이 순간이야말로 6·25전쟁전 소련영사관이 서울에서 철수한이후 거의 40년동안 단결되었던 한소관계를 다시 있게하는 역사적계기가 아닌가 생각된다.
소련국가원수가 한국의 한지도자와 굳게 악수하는 모습은 모스크바의 개혁물결이 서울의 봄과 접점을 찾은듯한 극적인 장면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그러나 멀리 떨어진 기자석에서는 「후쿠다」등 사람들에 가려 이 장면을 카메라에 담을수 없었다. 여하튼 신전총리는 소련최고지도자의 초청을 받아 크템린궁 리셉션에 참가하여 그와 인사를 나눈 최초의 한국인이 된것이다.

<소관리들 우호적>
특히 이날 보도진의 태도가 기자의 눈에 돋보였다. 「그로미코」의 연설이 끝날 때까지만 촬영이 허용되었고 수명의 보안관들은 아무런 제지도 하지않았다. 그런데 어떤 기자도 귀빈석앞에 접근, 촬영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기자들 앞을 지나갈때 아무도 마이크를 들이대고 질문하지도 않았다. 이것은 어디서나 국가원수에게 마이크와 카메라를 들이대는 구미언론의 취재방식과는 매우 다른 점이었다.
「그로미코」부처는 30여분후 조용히 퇴장했다. 그후 신전총리는 소련고위관리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 한 소련고위당국자와 한소관계개선에 관해 심도있게 협의했다. 그는 서울올림픽이후 직교역과 양국기업의 합작투자등 경제관계발전등을 설득력있게 주장했다. 소련측은 가까운 장래에 서울·모스크바간 연락사무소설치 필요성을 수긍했다.
또한 그는 특히 해방후 소련영사관이 서울에 있었음을 상기시키고, 그후에 어떻게 되었는지를 관심깊게 묻기도 했다. 기자는 소련당국이 이에 대한 상당한 조사를 했으며 많은 자료를 갖고 있구나 하는 인상을 받았다.
한국대표들은 이같이 크렘린궁 리셉션에서 매우 우호적인 대접을 받은 셈이다. 기자의 관심은 다시 이번회의 폐막성명내용에 쏠렸다.
이 성명이 서울올림픽에서 테러를 견제해 주느냐의 여부가 문제였다. 이번회의에 모스크바라는 장소탓인지 공산권인사들이 다수 참가하고 있었다. 소련의 「포포브」외교대학장·「이바노프」대외경협위원장·「페트롭스키」외무차관, 중공의 황화전외상, 「마네수쿠」루마니아전국가평의회의장등. 19일 아침「코헨」공보관이 오후5시 노보스티통신사에 있는 프레스센터에서 성명발표가 있을것이라고 알려왔다.
이날아침 미리 입수한 성명초안에는 테러문제가 빠져 있었다. 신전총리는 낮12시10분 이에 대한 연설을 했다. 이번 회의에서 정회원으로 격이 높아진 그의 연설은 큰 무게를 지닌 듯 했다.

<카드보이자 "웰컴">
그는 작년l2월 KAL기폭파사건을 규탄한 다음 서울올림픽이 테러로부터 절대로 보호되어야 하며, 따라서 이번성명에 이 문제가 분명히 취급되어야한다고 10분간 열변, 미소정상회담을 2주일 앞둔 시점에서 이 성명이 테러문제를 취급한다면 모스크바에서 서울올림픽의 안전을 부각시키는 큰의미가 있는 것이다.
기자는 주보프스키대로4번지 프레스센터를 찾아갔다. 기자회견장은 노보스티통신사건물중 왼쪽3층 APN(Novosti Press Agency)홀이었다. 수위가 입구에서 제지한다. 명찰을 보이면서 프레스 브리핑이라고 말하자 수위는 3층이라고 손짓으로 가르쳐 준다.
이 홀앞에 30대남녀가 기자들의 출입을 점검하고 있다. 다른 특파원들은 특파원카드를 내놓고 동시통역기를 받아 들어간다. 기자는 『서울에서 취재차 왔다』고 영어로 설명했으나 묵묵부답. 책상 가득 나열된 특파원카드를 보며 명함을 주었다. 영문명함을 훑어본 남직원이 그때야『유, 웰컴』하고 동시통역기를 쥐어주었다.
「슈미트」의장등이 정시에 도착, 1백20여명의 기자들에게 성명서를 돌린후 배경설명을 했다. 성명 제36항에 『인터액션 카운슬은 어떤 형태의 테러행위도 규탄한다…』고 비록 서울올림픽은 명시하지 않았지만 분명히 테러규탄이 못박아있다. 기자는 북한특파원을 찾아보았으나 그들은 오지않았다.
회견후 APN홀을 뗘나면서 직원들과 악수로 작별인사를 했다. 호텔앞에 모녀가 광주리에 장미꽃을 담아놓고 처량하게 팔고 있었다.
50코펙짜리(한화 7백여원)두다발을 사 호텔카운터 여직원에게 선물했다. 이번 모스크바 인터액션회의취재는 이렇게하여 무사히 끝마친 셈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