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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기 장관님 고맙습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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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임장혁 기자 중앙일보 콘텐트제작에디터
임장혁 중앙SUNDAY 차장

임장혁 중앙SUNDAY 차장

“박상기 장관에게 고마움을 느낍니다.”

지난 5일 의외의 장소에서 법무부 장관에게 고마움을 표현하는 사람을 만났다. 대전 서구에 있는 한 다단계 업자의 사무실. 그는 미국인 사장이 아이슬란드에 운영한다는 채굴장에 설치할 비트코인 채굴기를 대당 500만원 안팎에 판다고 한다. 지금도 매주 두 차례 이상 설명회를 여는 등 활발하게 활동 중인 그가 박 장관에게 고마워하는 이유를 듣고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작년 연말에 다단계가 어쩌고 말이 많았는데 (박 장관의) 거래소 폐쇄 발언 이후 언론과 정치권의 논의가 트레이딩 쪽으로 넘어가 일하기가 쉬워졌다.”

그는 암호화폐 법제화를 둘러싼 흐름을 정확히 짚고 있었다. 지난해 11~12월 금융당국자들은 “가상통화를 금융업으로 포섭해 공신력을 줄 가능성이나 필요성이 없다”(최종구 금융위원장), “암호화폐는 금융상품도 화폐도 아니다”(최흥식 당시 금융감독원장)는 등 암호화폐의 본질에 의문을 제기하는 발언을 쏟아냈다. 그러나 1월 11일 박 장관의 소신 발언이 20~30대의 강한 반발에 직면한 뒤 정부와 국회의 논의는 거래를 어떻게 규율할까의 문제로 축소됐다.

그러나 이런 식의 접근법은 틀렸다.

암호화폐가 드러낸 법적 구멍은 거래 규칙만이 아니다. 불법 다단계 업자들은 지금도 전국에서 채굴·프리세일·투자대행 등 다양한 아이템을 만들어 서민들의 고혈을 빨아먹고 있지만 규제 수단이 마땅치 않다. 유사수신규제법이 금전 거래를 겨냥해 설계됐기 때문이다. 투자도 암호화폐로 받아 미끼도 암호화폐로 던지는 신종 다단계에 이 법을 들이대자니 “지나친 유추해석은 안 된다”는 형사법의 대원칙이 법률가들을 망설이게 한다.

이 업자는 여러 곳에 수백만~수천만원의 기부금을 내며 선전에 열을 올리고 있다. “세금을 낼 수가 없으니 좋은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하는 일”이라고 말하는 순간 그의 손목에 번쩍이는 명품 시계가 거슬렸다. 암호화폐로 거둔 막대한 수익을 자유로이 현금화하고 있는 이들에게 적정한 세금을 매길 길이 없다.

외환거래법 적용 불능의 문제, 범죄수익이 암호화폐일 경우 몰수 가능성 문제 등 구멍은 여럿이다. 모든 문제의 출발점은 우리 법 체계에 암호화폐라는 새로운 실체를 반영할 법적 관념 자체가 깔려 있지 않다는 데서 비롯된다. 총론을 버려두고 각론만 만지작거리다 보면 누더기 법이 기술 발전도 사회 정의도 모두 가로막게 될 게 뻔하다. 최근 만난 여당 법사위원의 한 비서관에게 “누가 총대를 멜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돌아온 반문은 절망적이다. “재선을 포기한 사람?”

임장혁 중앙SUNDAY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