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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토즈쿠리’ 날개 단 일본의 모노즈쿠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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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손해용 기자 중앙일보 경제부장
손해용 산업부 차장

손해용 산업부 차장

세계 1위 에어컨 업체인 일본의 다이킨공업의 목표는 세상에서 가장 조용한 에어컨을 만드는 것이다. 고도의 기술과 막대한 비용이 필요한 작업이다. 하지만 인도에선 소비자들이 소음에 관심이 없다. 시원한 바람만 잘 나오면 된다. 다이킨공업이 인도에서 좀처럼 힘을 쓰지 못하는 이유다.

현재 인도 에어컨 시장 1위는 LG전자다. 말라리아·뎅기열 등 질병 피해가 크다는 점에 착안해 초음파로 모기를 쫓는 에어컨을 선보였다. 인도인들의 취향에 맞춰 화려한 꽃무늬 디자인 제품도 내놓았다. 철저한 현지화 전략이 적중한 것이다.

‘전자 왕국’ 일본을 세운 기틀은 최고의 제품을 만드는 장인정신을 상징하는 ‘모노즈쿠리(物作り)’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모노즈쿠리는 ‘품질과 기능만 뛰어나면 잘 팔린다’는 일본 기업의 자만으로 이어졌다. 고객의 목소리에는 귀를 막고 고급화 전략을 통해 브랜드 가치를 올리는 데만 신경을 썼다. 이들과 달리 삼성·LG 등 한국 기업은 현지 소비자의 성향과 수요를 분석해 그들이 원하는 제품을 만들었다. 한국 기업은 일본 기업이 선점하던 시장을 하나둘 빼앗아 갔다.

이랬던 일본이 달라지고 있다. 최근 일본 경제를 취재하며 자주 들은 말은 ‘고토즈쿠리’(事作り)다. 제품에 디자인·소프트웨어·서비스를 가미해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개념이다. 한국 기업처럼 소비자의 수요와 눈높이에 맞는 제품을 기획·판매하는 전략을 펼쳐가고 있다는 것이다.

닌텐도를 살린 ‘스위치’가 대표적이다. TV·모니터와 연결해 사용하는 가정용 게임기이면서, 휴대용 게임기처럼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밖에서도 게임을 즐길 수 있다.

저가 소형차에 역량을 집중해 인도 자동차 시장 1위에 오른 스즈키, 조명이 어두운 인도네시아 점포 사정을 고려해 여성이 선호하는 분홍색이 아닌 노란색으로 제품을 포장한 생활용품업체 유니참, 전기료가 비싼 동남아시아 국가에 초절전형 가전 브랜드를 내세운 파나소닉 등도 있다. 국내 최고의 일본 경제 전문가로 꼽히는 이지평 LG경제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고토즈쿠리를 통한 일본 기업의 경쟁력, 생산성 향상이 일본 경제 부활을 이끈 원동력이라고 진단했다.

이는 일본과 숙명적으로 경쟁해야 하는 한국 기업에는 중대한 위협이다. 당장 반도체·디스플레이 등을 제외한 제조업 상당수가 고토즈쿠리로 업그레이드된 일본 기업과의 경쟁에서 뒤처지는 신호가 감지된다. 자만에 빠진 과거의 일본처럼, 일부 기업의 반짝 실적 개선에 혹해 일본을 제쳤다고 착각한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겠다. 다 죽었다던 일본 기업의 부활을 지켜볼수록 걱정이 커가는 것은 나뿐이 아닐 것이다.

손해용 산업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