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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그럼 나도 4월에 하지 뭐"…北 회담제안 이미 알고 있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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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데이트

청와대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이 8일(현지시간) 오후 미국 워싱턴 백악관 오벌오피스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만나 방북 성과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청와대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이 8일(현지시간) 오후 미국 워싱턴 백악관 오벌오피스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만나 방북 성과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그럼 나도 4월에 하지. 뭐" (트럼프 미국 대통령)
이 한마디에 정의용 국가안보실장과 서훈 국정원장, 조윤제 주미대사는 당황했다. 지난 8일 오후 5시를 조금 넘긴 시간 백악관 오벌 오피스.
정 실장이 김정은 북한 노동당위원장으로부터 전달받은 북·미정상회담 제안을 전하자 트럼프는 "오케이. 빠른 시간 내에 하자고 전해라"고 화답했다.

작년부터 북한 의향 파악하고 적절 시점 모색해 왔다 #대북 제재 압박 효과보고 북한 버거워할 때를 노려 #트럼프,"나도 4월에 하지"에 정의용-맥매스터 '5월 이내'로 매듭 #

다시 정 실장이 조심스레 "4월에 남북정상회담이 예정돼 있는데…"라고 말을 흐리자 트럼프가 돌연 '4월 동시 회담'을 들고 나온 것이다. 이 자리에선 5월로 미룬다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트럼프는 그러면서 마이크 펜스 부통령, 존 켈리 비서실장, 제임스 매티스 국방장관, 허버트 맥매스터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쪽을 쳐다보더니 "보라, 내가 말한대로 그렇게 되지 않았느냐"고 으쓱해 했다고 한다. 익명을 요구한 한 소식통은 "정 실장이 오벌오피스 45분 회동이 끝나고 백악관 별도 회의실로 옮겨 맥매스터와 발표문을 조율하는 과정에서 사실상 '남북회담 후'를 뜻하는 '5월까지(by May)'란 표현을 넣는 데 성공했다"고 전했다. 하마터면 4월 동시 개최라는 이상한 모양새가 될 뻔 한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대북 특별사절 대표단으로 방북했던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이 8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백악관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과의 면담 내용을 발표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의 대북 특별사절 대표단으로 방북했던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이 8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백악관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과의 면담 내용을 발표하고 있다.

뉴욕타임스(NYT)는 10일(현지시간) "트럼프 대통령이 불과 45분 만에 역사를 바꿨다"고 보도했다. 트럼프가 이날 정 실장의 이야기를 듣고 즉흥적으로 회담을 수락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실은 이 45분 안에는 450시간, 아니 45일 이상의 노력이 응축돼 있었다.

외교 소식통은 "이미 미국은 작년부터 북·미 간 자체 루트를 통해 '톱(top) 끼리의 회담을 통해서만 양국 간 문제를 풀 수 있다'는 북한의 의향을 파악하고 있었다"고 전했다. 북한의 '톱 다운' (top-down·하향식) 방식에 대한 집착은 강했다고 한다. 이런 방침은 트럼프 대통령 등 수뇌부에게 수시로 보고가 됐다.

문재인 대통령이 11일 오후 청와대 관저 소회의실에서 미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게 방북 결과를 설명하고 귀국한 정의용 청와대 안보실장과 서훈 국정원장 등 대북특사단원들에게 방문 결과를 보고 받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11일 오후 청와대 관저 소회의실에서 미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게 방북 결과를 설명하고 귀국한 정의용 청와대 안보실장과 서훈 국정원장 등 대북특사단원들에게 방문 결과를 보고 받고 있다.

다만 지난해는 '최대의 압박(maximum pressure)' 기간이었고 북한에게 대화의 진정성을 찾을 수 없는 만큼 "자진해서 현실적으로 나올 시간을 주자"는 쪽으로 기울었다고 한다. "최대 압박의 효과가 쭉 올라가 북한이 버거워할 때가 적절한 타이밍"이라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북한의 평창올림픽 참가를 계기로 북미 간의 입질이 활발해졌다. 펜스 부통령이 개막식에 참석하기 위해 방한하기 보름 여 전인 1월 20일 경. 오벌 오피스 회담 47일전 쯤이었다.

북한이 펜스를 만나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CIA(중앙정보국)가 입수하면서 북·미 간 물밑 접촉은 본격화됐다. 이번 과정에서 국무부는 완전 배제돼 있었다고 한다. 북한이 당초 펜스-김여정 만남을 갈망한 것은 북·미 정상회담 성사를 위한 전주곡이었다. 그렇다면 북한은 왜 막판 2시간 전에 만남을 취소했을까.

외교 소식통은 "펜스 부통령이 천안함 기념관을 가거나 추가 제재 방침을 발표한 게 취소 이유로 알려졌지만 사실 북한은 그건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고 전했다.
만남 예정 전날 펜스 부통령이 리셉션장과 개막식장에서 보인 '완전 무시' 반응을 보고 "김정은 여동생(김여정)이 참석하는 회담이 안 좋은 결과로 끝날 것에 대한 부담 때문에 심야에 평양 지시를 받고 취소했다"는 것이다. 즉 바꿔 말하면 미국과의 대화를 거부하는 쪽으로 방향을 튼 게 아니라 어쩔 수 없이 김여정에 부담을 주지 않는 결정을 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과 부인 김정숙 여사, 북한 김여정 제1부부장(뒷줄 왼쪽 둘째)과 김영남 상임위원장(뒷줄 왼쪽 첫째)이 9일 평창 올림픽 개회식에서 남북 단일팀 입장에 박수 치고 있다. 앞줄 오른쪽부터 아베 신조 일본 총리,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 내외. 그 뒤는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 독일 대통령 내외. >

문재인 대통령과 부인 김정숙 여사, 북한 김여정 제1부부장(뒷줄 왼쪽 둘째)과 김영남 상임위원장(뒷줄 왼쪽 첫째)이 9일 평창 올림픽 개회식에서 남북 단일팀 입장에 박수 치고 있다. 앞줄 오른쪽부터 아베 신조 일본 총리,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 내외. 그 뒤는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 독일 대통령 내외. >

이번 정 실장 일행 방미를 앞두고도 트럼프는 이미 김정은의 북·미 회담 제안 사실을 접수한 상황이었다고 한다. 정 실장이 북한에서 돌아오자마자 맥매스터 보좌관에 이를 전달했고, 양국 정보기관 간에도 긴밀한 정보교환이 이뤄졌다고 한다.
외교 소식통은 "어떤 이야기(정상회담 제안)일지는 이미 상당수가 알고 있었지만 트럼프가 바로 자신의 결정을 공표할 줄은 몰랐다"고 전했다. '협상가' 트럼프로선 취임 후부터 이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일 수 있다.

다른 관계자도 "트럼프는 결국 자신이 톱 다운으로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굳히고 있었던 것"이라며 "북한과 마찬가지로 미국도 이번 회담에선 트럼프가 선(합의 지침)을 일단 그어둔 다음, 밑에서 그에 맞춰 나가는 방식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따라서 김여정 대미특사, 혹은 틸러슨 국무장관 대북특사 같은 '중간 단계'는 집어넣지 않을 것이란 주장이다.

소식통은 정 실장이 오벌오피스에서 트럼프에게 정상회담 건 이외의 '특별 메시지'를 전했다고 하는 것과 관련, "대북 특사단이 받은 김정은의 인상, 김정은의 말하는 순서(어순), 김정은 발언에 대한 특사단 자체의 분석을 전달하는 가운데 김 위원장이 했던 '미국 관련 발언' 한 가지를 간단히 전달했던 것일 뿐"이라며 "특별히 김 위원장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주라고 한 메시지는 아니었다"고 말했다.

이 소식통은 또 "일부 보도처럼 ▶북미 평화협정에 대한 강한 의지와 국교 정상화 ▶평양 주재 미국 대사관 설치 방안 ▶북한에 억류돼 있는 한국계 미국인 3명의 추방(석방) ▶대륙간 탄도미사일(ICBM) 동결 및 폐기 방안 등은 (김정은이 전한 특별 메시지가) 아니다"고 덧붙였다.

워싱턴=김현기 특파원 luckym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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