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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투 물결 속 남성들, "문제인줄 몰랐던 우리, 방관자이자 피해자"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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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여성사회단체소속 남녀 회원들이 8일 '110주년 3·8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천안역광장에서 집회를 열었다. [연합뉴스]

충남 여성사회단체소속 남녀 회원들이 8일 '110주년 3·8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천안역광장에서 집회를 열었다. [연합뉴스]

 "여자 형제도 없었고, 가부장적인 분위기 속에서 자랐다. 만났던 여자친구들이 '가르치려고 든다. 가부장적이다'고 했지만 뭐가 잘못이었는지 잘 몰랐다.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여자친구가 성차별 때문에 힘들어하는데 이해가 안 돼 다툰 적도 많다."(취업준비생 장완재씨)

 "머리를 기르다보니 '여자처럼 하고 다니냐'는 소리도 많이 들었다. 섬세한 성격에 지금까지 '여자 같다. 게이냐'는 성차별적 발언을 많이 들어왔다. 남성적이지 않다고 무시당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성 평등 분위기와 미투운동 속에서 언젠가 사라질 것이라고 믿는다."(서울대 경제학과 이선준씨)

최근 미투운동의 물결 속 권력관계 지적과 남성에 대한 고발이 이어지는 가운데 20~30대 남성들 사이에서는 남성도 제도교육과 가부장제의 피해자라는 인식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교육제도와 미디어 등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자신의 행동이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전혀 인지하지 못했고, 자신들도 피해를 봐왔다는 것이다.

남중·남고를 졸업한 박모(30)씨는 "학창시절 선생님이 체벌로 성기를 만지거나 음모를 뽑기도 했다. 수치심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교실에서 야동이나 성적인 이야기를 하고 웃고 떠들면서 이런 문화를 반성 없이 수용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대학원생 이모(27)씨는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남성이 여성에게 위압적인 스킨십이나 키스를 하는 모습을 보며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최근 미투운동 등을 통해 폭력일 수도 있겠구나 싶더라. 과거 헤어진 연인 집 앞에서 술 취한 채 기다린 적이 있는데 지금은 잘못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세계 여성의 날인 지난 8일 오후 서울 명동 YWCA회관 앞에서 열림 한국YWCA연합회원들의 미투 운동. [중앙포토]

세계 여성의 날인 지난 8일 오후 서울 명동 YWCA회관 앞에서 열림 한국YWCA연합회원들의 미투 운동. [중앙포토]

일부 직장인들은 남성중심 조직문화에 대한 고통을 호소하면서 미투운동이 조직문화를 바꿀 것으로 기대한다. 정보기술(IT)업계에서 일하는 직장인 이모(31)씨는 "단체 메시지방에서 여직원들을 '얼평'(얼굴평가)하고 여성혐오를 드러내던 이들이 안희정을 격하게 욕하는 모습을 보며 나를 돌아봤다. '나도 잘못하고 있다'고 생각했다"고 전했다. 이어 "사소한 것이라고 생각했지, 잘못이라고 생각한 적 없다. 교육과정과 미디어가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해 남성들의 실수를 양산해내는 것은 아닌가 싶다"고 지적했다.

은행원 박모(29)씨는 "군대 문화가 심하고 남성성이 강조되는 조직 분위기가 부담이다. 미투와 함께 선배들이 후배들을 유흥업소에 데려가는 문화도 바뀌었으면 한다. 후배들이 가고 싶어한다고 생각하는 것도 시대착오적이다"고 강조했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변화를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보면서도 '남성도 피해자'라는 인식이 여성의 차별과 억압을 은폐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경희대 사회학과 황승연 교수는 "사회의 조직문화와 제도가 개인의 의식과 젊은 세대의 생각을 따라가지 못해 괴리가 생긴다. 남성들의 각성과 변화 모색은 긍정적인 부분이다"고 평가했다.

건국대 몸문화연구소 윤김지영 교수는 "미투운동에서 가해자와 방관자 남성들도 '이 판의 관습은 원래 그랬다'고 말하며 구조 탓을 돌렸다. 남성을 그저 수동적인 피해자로 보는 것은 가부장적 질서 안에서 남성이 누려온 기득권을 부인하고 여성의 피해를 은폐하는 것이다"고 지적했다. 이어 "남성이 가부장제의 수혜자이자 잠재적 가해자임을 인정해야 한다. 몇몇 남성만이 성폭력을 저질렀으니 격리하면 된다는 관점이 아니라 동료 여성이 상관으로부터 성희롱 당할 때 본인은 방관했는지, 어떻게 했는지 반성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여성국·정진호 기자 yu.sungku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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