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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 같다며 바지 내리신 의원님"... 봇물 터진 정치권 미투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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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정 전 충남지사(왼쪽)와 그의 성폭행을 폭로한 김지은 충남도 정무비서. [연합뉴스]

안희정 전 충남지사(왼쪽)와 그의 성폭행을 폭로한 김지은 충남도 정무비서. [연합뉴스]

정치권에도 미투(#MeToo) 파문이 몰아닥쳤다. 5일 안희정 전 충남지사에 대한 성폭행 폭로와 국회에 재직 중인 여성 비서관의 첫 성추행 실명 증언이 겹치면서다.

6일 국회 투고 게시판 ‘여의도 옆 대나무숲’에는 새로운 폭로가 이어졌다. “이 의원님 안녕하세요, 저는 잘 지내지 못합니다”로 시작하는 글에는 “제가 딸 같다며 며느리 삼고 싶다던 의원님, 따님분들 앞에서도 제 앞에서 그랬듯 바지를 내리시는지요”라며 성폭력을 암시하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6일 페이스북의 국회 익명 투고 게시판에 올라온 미투 동참 글. 이씨 성을 가진 국회의원에게 성폭력을 당했다는 내용이다. [페이스북 캡쳐]

6일 페이스북의 국회 익명 투고 게시판에 올라온 미투 동참 글. 이씨 성을 가진 국회의원에게 성폭력을 당했다는 내용이다. [페이스북 캡쳐]

이어 “얼마 전 의원님께서 미투 운동을 지지한다며 가해자를 비난하는 기사를 보았다”며 “그 기사를 본 날 저는 아침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어 “의원님의 더러운 성욕 때문에 저희 부모님은 딸에게 더러운 말을 하는 의원님의 목소리를 생생히 들어야만 했고, 저는 부모님 가슴에 대못을 박은 죄인이 됐다”고 했다.

한편 첫 미투 고백의 가해자로 지목된 보좌관은 이날 면직 처리됐다. 채이배 바른미래당 의원은 "더불어민주당 의원실 재직 당시의 일이지만 절대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일"이라며 자신의 의원실 소속 보좌관을 서둘러 내보냈다.

지난 5일 국회 홈페이지 국민제안 게시판에 올라온 첫 실명 미투 글. [국회 홈페이지 캡쳐]

지난 5일 국회 홈페이지 국민제안 게시판에 올라온 첫 실명 미투 글. [국회 홈페이지 캡쳐]

국회 투고 게시판 ‘여의도 옆 대나무숲’에 미투 관련 글이 등장한 건 2월 초부터다. 서지현 검사의 폭로 직후였다. “검사님의 용기에 박수를 치면서도 씁쓸하다. 그런 일은 여기 의원회관에도, 우리 방에도… 나는 아무 말도 못 했는데” “요새는 여자 보좌진들끼리 만나면 미투 얘기만 한다. ‘너도 미투야?’로 시작하면 얘기가 끝이 없다” 등이었다.

허민숙 국회 입법조사관은 “그동안 사법부가 가벼운 판결을 내려 성범죄가 만연하다는 인식이 있었는데, 정작 그 법과 제도를 만드는 국회에는 감시자가 없었다”며 “시한폭탄이었던 국회에 불이 붙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문화예술계를 중심으로 미투 운동이 확산되자 여야는 경쟁적으로 미투 관련 법안을 냈다. 바른미래당은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개정안 등 7건을 발의하고 ‘이윤택 처벌법’이라 명명했다. 형량·공소시효 등을 늘리는 내용이었다. 민주평화당 역시 사실적시에 의한 명예훼손 규정 삭제 등을 내용으로 한 법 개정을 추진 중이다. 더불어민주당은 젠더폭력TF를 출범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국회 안의 성추문엔 외면하거나 침묵하고 있다는 비판이 적지 않다. 한 보좌관은 “‘국회는 법을 만드는 곳이지 지키는 곳이 아니다’라는 자조적인 말이 나올 만큼 국회 보좌진은 법의 사각지대였다"고 전했다.

국회 재직자들의 익명 투고를 위한 페이스북 게시판. [페이스북 캡쳐]

국회 재직자들의 익명 투고를 위한 페이스북 게시판. [페이스북 캡쳐]

국회 보좌진이 성폭력에 취약하다는 지적은 보좌진의 특수한 신분에 기인한다. 국회 보좌진은 입법 등에 관여해 일종의 권력을 갖고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고용 불안정에 시달린다. 의원 1인당 9명의 보좌진(4급 보좌관 2명, 5급 보좌관 2명, 6~9급 비서와 인턴)을 둘 수 있는데, 별도의 공채 시스템이 없이 해당 의원이 인사권을 100% 행사한다. 의원 한명을 정점에 두고 폐쇄적인 피라미드 구조를 띠고 있는 셈이다. "형태만 다를 뿐 대학로 극단이나 의원 사무실이나 마찬가지"라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근로기준법상 보장되는 해고예고제(최소 30일 전 통보)도 국회에선 무용지물이다. 아무 때나 뽑고, 아무 때나 자를 수 있다는 얘기다. 한 전직 보좌관은 “국회의원이 감정적으로 보좌진을 해고하는 경우도 많다”며 “해고예고제를 적용하는 건 물론, 해고 사유가 타당한지 심의하는 기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보좌진의 남녀 비율 불균형도 심하다. 국회 사무처 등에 따르면 4급 보좌진 중 남성은 93%인 반면, 8~9급의 여성 비율은 60~70%에 이른다. 한 여성 비서관은 “사실상 인사권에 영향을 미치는 남성 상급 보좌진이 평판도 쉽게 만들어낸다. 바닥도 좁은 터라 '싸가지 없는 비서'라는 소문이 나면 다른 의원실로 옮기는 건 사실상 불가능"이라고 토로했다.

김윤철 경희대 후마니타스 교수는 “성폭력 피해를 신고 한 후 보복을 당할까 봐 두려워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특히 하급 보좌관에 대한 권익 보호 장치가 필요하다”며 “보좌진협의회 차원에서 피해자 보호를 위한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건 물론 국회도 정기적으로 성폭력 실태 조사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경희ㆍ김준영 기자 am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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