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위 "93년 이후 개설된 차명계좌에도 과징금 부과하겠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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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범 금융위원회 부위원장이 5일 오후 서울 세종로 정부서울청사에서 금융실명법 관련 제도개선 방향에 대한 발표를 하며 지료를 직원에게 주고 있다. [연합뉴스]

김용범 금융위원회 부위원장이 5일 오후 서울 세종로 정부서울청사에서 금융실명법 관련 제도개선 방향에 대한 발표를 하며 지료를 직원에게 주고 있다. [연합뉴스]

금융위원회가 1993년 8월 12일 금융실명제 시행일 이후 개설된 차명계좌에도 과징금을 부과하는 금융실명법 개정을 추진한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인데, 잃어버린 소를 찾아올 수 있을지는 불투명하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차명계좌 전체에 과징금을 부과하려면 개정안을 소급 적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실명법 개정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 #탈법목적 차명계좌에 제재 강화 #이건희 회장에 소급적용될지 불투명

5일 김용범 금융위 부위원장은 기자간담회를 열고 이러한 내용의 금융실명제 제도개선 추진 방향을 설명했다. 현행 금융실명법에 따르면 금융자산 가액의 50%를 과징금으로 떼는 벌칙 조항은 실명제 시행일(93년 8월 12일) 이전에 개설된 차명계좌만 대상이다. 금융위는 법 개정을 통해 이 범위를 대폭 넓혀 언제 개설됐든 상관없이 과징금을 부과할 수 있게 하기로 했다. 93년 8월 12일 이후에 개설된 차명계좌라고 해도 과징금을 매기겠다는 계획이다.

다만 ‘탈법 목적’의 차명계좌에만 과징금 제도를 도입한다고 밝혔다. 배우자, 자녀, 동창회 명의 차명계좌 같은 일반적인 선의의 차명계좌는 과징금 대상이 아니라는 뜻이다. 김 부위원장은 “탈법 목적임이 객관적으로 밝혀져야 과징금 대상”이라고 설명했다. 예컨대 검찰 수사나 국세청 조사, 금감원 검사 등을 통해 비자금 조성이나 조세포탈, 자금세탁 같은 범죄·탈법 목적임이 밝혀진 차명계좌가 과징금 부과 대상이다.

현재 50%인 과징금 부과비율을 얼마로 할지는 “입법과정에서 국회와 논의하겠다”며 밝히지 않았다. 과징금을 산정하는 시점에 대해서는 김 부위원장은 “차명임이 드러나는 시점으로 현행화하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현행법은 과징금 산정 시점을 ‘긴급명령 시행일 현재(1993년 8월 12일)의 금융자산 가액’으로 정하고 있는데, 이를 ‘차명임이 드러난 시점의 금융자산 가액’으로 바꾼다는 의미다. 금융실명제가 시행된 지 25년이나 지나서 당시 시점을 기준으로 과징금을 매기는 것은 제재의 현실성이 상당히 떨어지기 때문이다. 실제 5일 금융감독원 검사 결과에 따르면 이건희 회장이 실명제 시행일 전 개설한 차명계좌 27개에 현행법에 따라 부과되는 과징금 액수는 30억9000만원에 그친다. 만약 이를 2008년 삼성 특검 결과 발표 시점으로 했다면 과징금 액수가 훨씬 더 컸을 것으로 예상된다.

문제는 과연 개정될 금융실명법이 소급적용될 수 있느냐는 점이다. 이를 소급적용하지 않는다면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돼 시행된 뒤에 검찰 수사 등으로 탈법 목적임이 드러난 차명계좌에만 과징금을 부과할 수 있다. 이 경우 2008년에 이미 드러난 이건희 회장 차명계좌 1229개 중 실명제 시행일 이후에 개설된 계좌 1202개엔 여전히 과징금을 부과할 수 없게 된다.

금융위는 이 부분에 대해 명확한 답변을 피했다. 김용범 부위원장은 “어디까지가 소급이냐, 아니냐는 국회 논의 과정에서 검토해야 한다”며 “과징금 부과 대상의 기준, 방법에 대해 입법 추진과정에서 제도 개선 취지가 최대한 발휘되도록 국회와 적극 협의하겠다”고 말했다.

개정되는 금융실명법엔 수사기관·과세당국·금융당국이 차명 금융거래 정보를 공유할 수 있게 하는 내용도 포함된다. 실명법 위반이 발견되면 신속하게 과징금을 부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또 금융회사가 원천징수하지 않고 과세당국이 자금의 실제 권리자에게 직접 과징금을 부과할 수 있게 하는 규정도 신설키로 했다. 아울러 탈법목적의 차명 금융자산임이 검찰이나 국세청을 통해 밝혀지면 이를 빼내지 못하도록 막는 지급정지조치도 마련한다.

한애란 기자 aeyan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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