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이슈] 론스타 '4조원대 대박'이 남긴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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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한국 경제를 이끌어온 사람들이 일개 사모(私募)펀드에 '실력'에서 졌다." 이를 인정하고 반성하는 게 론스타가 남긴 교훈의 첫 단추라고 본다. 경제 관료들, 은행 사람들부터 옆에서 훈수를 두던 경제학자들까지. 그러나 여태껏 누구도 이를 인정하는 사람이 없다.

시계추를 2003년 외환은행 매각 당시로 돌려보자. 당시 외환은행은 큰돈을 빌려주었던 하이닉스.현대건설 등이 부실해지는 바람에 덩달아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런 은행에 론스타는 1조3800억원을 베팅했다. 그 차이는 실력이었다. 경제에서 실력은 '미래를 내다보는 눈'이다.

2002년 봄 취임한 외환은행 이강원 행장은 처음에 증자를 하려 했다. 그러나 주주들 누구도 선뜻 참여하려 하지 않았다. 한 번은 이 문제로 재정경제부 장관, 금융감독위원장, 한국은행 총재 3자가 만났다. 한은은 1967년 외환은행을 만든 모태다. 그런데 한은조차 증자를 거부했다.

공적자금 투입도 검토됐으나 곧바로 이야기가 쏙 들어갔다. 외환위기 직후 정부는 수십조원의 공적자금을 풀었다. 몇 년 뒤 한나라당이 "국민 혈세로 만든 공적자금을 빨리 회수하라"고 다그쳤다. 그러자 정부는 월별.연도별 그래프까지 만들어가며 공적자금 회수에 나섰다. 그러면서 '외자 유치'명분을 내세웠다. 부실 금융회사를 외국에 팔아 공적자금을 회수하겠다는 것이다.

인수합병(M&A)의 제1조는 '상대방에게 자기 카드를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언제까지 팔겠다는 일정표까지 만들었으니 인수하는 입장에선 여유와 배짱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구조였다. 그런 가운데 제일은행을 5000억원에 산 뉴브리지캐피털은 1조1800억원을 벌었다. 한미은행을 산 칼라일은 7000억원을 챙겼다.

다음은 매각이었다. 하지만 국내 은행들은 아무도 외환은행의 잠재력을 보지 못했다. 배짱도 없었다. 인수해서 성공하면 다행이지만, 실패하면 책임을 온통 뒤집어 쓸 것이란 분위기가 팽배했다. 그 틈을 론스타가 비집고 들어왔다. 론스타는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국내에 상륙했다. 2000년까지는 부실채권을 헐값에 사들여 되파는 일을 주로 하다 2000년대 들어 서울 역삼동 스타타워 빌딩 등 부동산 매입을 거쳐 기업.금융기관 인수에 나서며 규모를 키웠다. 숱한 투자에서 한번도 실패하지 않는 솜씨를 보였지만 얼마 벌었는지조차 베일에 싸여 있을 만큼 철저한 비밀주의를 고수해왔다.

더욱 근본적인 문제는 냉탕.온탕식 경제운용이다. 우리 경제는 97년 외환위기를 맞은 뒤 불과 2~3년 만에 벤처 붐이 일면서 언제 위기가 있었느냐는 식으로 달아올랐다. 그 뒤 '카드 대란'이 터지면서 2003년 무렵 다시 가라앉았다. 한국은 경제의 진폭이 커서 흐름만 잘 타면 대박을 터뜨릴 수 있는 나라로 인식되게 됐다. 미국 뉴욕의 월가에선 "한국에서 투자해 돈을 버는 것은 너무 쉽기 때문에 실력으로 인정 안 해준다"는 말까지 나온다. 경제를 안정적으로 운영하지 못한 결과다.

허술한 제도도 보완해야 한다. 우린 미국과 이중과세방지(하나의 수익에 대해 두 나라에서 세금을 물릴 수 없다는) 협정을 맺고 있다. 하지만 미국 펀드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큰돈을 벌었지 우리 펀드들이 언제 미국 가서 큰돈 번 적이 있나. 공평한 것 같은 이 협정의 함정은 이런 데 있다.

억울해하고 배 아파하기 전에 이런 문제에 대한 반성부터 해야 제2의 론스타를 피할 수 있다. 차제에 '론스타 연구회'를 만들면 어떨까.

민병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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