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겨읽기] 외교관 + 국제무역상 + 무기수입상 + 첩보원 … 역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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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최대 갑부 역관
이덕일 지음, 김영사, 220쪽, 9900원

영어가 통하지 않고서는 움쭉달싹 못하는 세상이다. 진학이고 취업이고 영어는 기본이다. 영어 뒤를 중국어와 일본어가 좇는다. 외국물 못 먹은 사람 서러운 게 우리 사회다. 먼 나라건 이웃 나라건 다 상대해야 먹고 사는 땅덩이 특성 때문이다. 외국어 잘하는 이가 대접받는 요즘, 인기 전문직으로 떠오른 동시통역사는 과연 옛날에도 떵떵거리며 살았을까.

대중 역사저술가 이덕일(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씨는 고려말과 조선시대의 통역사인 역관(譯官)을 불러냈다. 역관은 역사의 그늘에 가려있었다. 양반 사대부가 아니라 천한 일을 하는 중인(中人)이어서다. 정작 중국 사신 앞에서는 입도 떼지 못해 웃음거리가 되면서도 한음(漢音: 중국어 발음) 유창한 역관을 업신여긴 것이 사대부였다. 양반의 이런 이중적인 틈새에서 나라를 살리고 자신의 이익을 챙긴 이가 역관이다.

말이 통하는 역관은 할 일이 많았다. 2006년 시각으로 보면 그는 '여러 가지 문제 연구실천소장'이었다. 직업외교관과 국제무역상이 첫째 일이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군사를 파견하게 한 일등 공신이 역관 홍순언이었다. 명분에 매달려 있던 무능한 사대부를 제치고 청나라와 외교 담판으로 우리 영토를 지킨 김지남.김경문 부자도 역관이다. 말뿐 아니라 물건과 물건을 소통시키는 구실 또한 역관의 일이었다. 사대부는 돈을 직접 만진다고 역관을 천하게 여겼지만 그들이 중국에서 사들여온 무역품을 앞 다퉈 사들인 계층 또한 사대부였다. 조선 경제가 일어설 수 있었던 힘이 중국과 일본 사이를 오간 역관의 중개 무역에서 나왔으니 실물 경제의 큰 손이었던 셈이다.

역관은 때로 무기 구입상 구실도 했다. 상대국의 정보를 빼오거나 반출이 금지된 원료를 구해오는 첩보원으로도 활약했다. 일찍 외국 문물에 눈떠 서구사상과 과학지식을 받아들인 개화사상의 주역 중에도 역관이 많다. 천주교를 수용한 신자 가운데도 역관이 두드러진다.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애국계몽운동과 독립운동에 나선 이 역시 역관 출신이 다수였다. 역관이 중개 무역으로 쌓은 재산을 독립자금으로 선뜻 내놓은 것도 외교 현장에서 자주권의 중요함을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조선 최대 갑부 역관'은 김영사가 새로운 감각의 역사서 시리즈로 기획한 '표정있는 역사' 첫째 권이다. 작지만 실은 거대했던 밑바닥 인생의 이야기, 강이 아니라 시냇물로 흘러가던 당대의 희로애락을 생생하게 묘사하겠다는 역사관을 '표정있는' 이란 표현에 담았다.

정재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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