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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새로운 세상을 갈망하다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573호 06면

영화는 늘 무엇(what)이 아니라 왜(why)에서 출발한다. 그게 무슨 영화냐는 질문보다 왜 지금 그 영화냐 혹은 왜 요즘 같은 때에 이런 영화를 만들었느냐 같은 물음이야말로 해당 영화의 핵심에 보다 근접할 수 있게 만든다.

제90회 아카데미 영화제 관전 포인트

예컨대 4일(한국시간 5일) 열리는 제90회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에 오른 ‘더 포스트’가 그런 경우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은 요즘 같은 트럼프 시대에 도대체 왜 1971년 미국 국무부 비밀문서 폭로 과정을 그린 이 영화를 만들었을까.

영화는 미국 현대사에 있어 (사람들은 많이 잊었지만) 가장 중요한 기점이 됐던 대니얼 엘즈버그 사건을 다룬다. 엘즈버그는 군사전략가로서 베트남 전쟁에 깊숙이 개입했고 미국 정부가 이 전쟁에 대해 사기극을 벌이고 있다는 결정적 증거의 문서 4000쪽을 빼돌린다. 영화의 핵심 내용은 엘즈버그의 이 문서를, 처음엔 뉴욕타임스가 나중에는 워싱턴포스트가 대서특필하는 과정이다. 당시 닉슨 정부가 대법원을 동원해 두 신문사를 탄압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마치 요즘의 트럼프가 모든 언론을 정적(政敵)아닌 공적(公敵)으로 돌리듯.

만약에 닉슨에게 트위터가 있었다면 자신의 가짜 뉴스만을 진리인 양 호도했을 것이다. 스필버그는 아마도 시대가 다시 반동(反動)하고 있다고 우려하는 듯하다. 언론의 자유가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더 포스트’와 관련된 “왜?”에 대한 답변은 바로 그 지점에서 찾아진다.

올해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작 면면을 보면 완전히 트럼프에게 한 방 먹이는 형국이다. ‘더 포스트’를 비롯해 ‘셰이프 오브 워터’ ‘쓰리 빌보드’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겟 아웃’ ‘덩케르크’ ‘레이디 버드’ ‘다키스트 아워’ ‘팬텀 스레드’의 9편은 트럼프가 그렇게나 싫어하는 ‘이민자들의 미국’을 표방하고 있다. 트럼프는 러스트 벨트(Rust Belt·미국 중동부와 북서부의 쇠락한 공업지역)에 사는 백인 중하층의 지지만으로 나라를 운영하려 한다. 그것이 강력한 미국의 재 건설이라고 믿는다. 그럼으로써 온 나라와 온 세상에 인종적 편견과 성적(性的) 갈등, 역사 왜곡과 자국 이기주의의 기이한 근성만을 퍼뜨린다.

아무도 그런 트럼프를 제지하지 못하고 있는 이 때에 할리우드가 나서고 있다. 특히 아카데미는 ‘더 포스트’와 ‘덩케르크’ ‘다키스트 아워’ 등으로 역사의식을 곧추 세우고 ‘쓰리 빌보드’를 통해 진정한 미국적 가치는 무엇인지를, ‘셰이프 오브 워터’와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등 나머지 작품을 통해 흑인과 여성, 성 소수자와 신세대들을 전면에 배치하고 트럼프와의 전선(戰線)을 펼친다. 편협한 미국과 맞서 싸우겠다는 것이다. 아카데미는 지금, 더 나아가 영화는 지금, 진정으로 프로파갠다(propaganda·정치적 선전)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셈이다.

그건 모든 영화제, 영화상들이 해내고 있는 시대적 임무같은 것이기도 하다. 지난 2월 중순 열렸던 제68회 베를린영화제 수상작들을 열거해 놓고 보아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영화가 지금 표방하고 있는 것은 한 마디로 ‘타임즈 업(Time’s up)’이다. 구 세대를 갈아 치우고 새로운 세대를 등장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대상인 황금곰상을 받은 ‘나를 만지지 마·Touch Me Not)’부터 ‘신시대(New Era)’에 걸맞는 작품들로 즐비하다. 유럽 영화계 역시 낡은 것을 과감히 벗어 던지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럴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예술적으로, 미학적으로 무엇보다 정치적으로, 역사적으로 오히려 퇴보하는 중이었다. 그것을 지금 ‘미투(MeToo)’ 운동이 해내고 있다. 올 아카데미도 ‘미투’와 결합하는 모양새다. 매우 적절하면서도 전략적인 결합이다. 영화가 종종 시대를 주도한다고 얘기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글 오동진 영화평론가,  사진 각 영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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