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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고은문학관에 6000㎡ 땅 제공 철회 … 독이 된 ‘셀럽 마케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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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서울도서관(옛 서울시청사) 3층에 있는 고은(84) 시인의 기념 공간 ‘만인의 방’(60㎡)은 지난달 27일 전면 철거 수순에 들어갔다. 조금의 흔적도 남기지 않겠다는 게 서울시의 입장이다. 노벨 문학상 단골 후보로 거론돼 왔던 고은 시인은 최영미 시인의 폭로 이후 과거 여성 문인 등을 성희롱·성추행했다는 추문에 휩싸였다. 미투(#MeToo·나도 당했다) 운동이 사회 전반으로 번지면서 철거해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었다.

수억 지원해 모시기 경쟁했다 부메랑

서울시, 3억에 만든 ‘만인의 방’ 철거

고은 시인 기념

고은 시인 기념

‘만인의 방’은 지난해 11월 서울시가 약 3억원을 들여 만든 곳이다. 고은 시인이 『만인보(萬人譜)』를 집필하던 옛 경기도 안성시 서재를 재구성했다. 시인이 사용한 서가와 책상, 육필 원고를 볼 수 있었다. 인물 연구자료와 도서 3000여 권, 평소 사용하던 안경·모자·옷도 전시돼 있다. 서울시는 고은 시인에게 이들 물품을 모두 돌려줄 예정이다.

지방자치단체가 성폭력 가해자로 지목된 ‘셀럽(유명인)’의 흔적 지우기에 나섰다. 셀럽 마케팅을 위해 모시기 경쟁까지 마다치 않았던 지자체지만 미투 운동에 따른 부정 여론을 거스를 수 없어서다. 자연히 셀럽에게 지원했던 시설 등의 활용을 앞으로 어떻게 할지 골머리를 앓고 있다.

고은 시인 모시기에 상당한 공을 들였던 경기도 수원시도 ‘흔적’ 지우기에 나섰다. 수원시는 시인의 고향인 전북 군산시를 비롯해 강원도 태백시, 경기도 파주시와 한때 모시기 경쟁을 벌인 바 있다. 결국 2013년 수원시 장안구 상광교동에 문화향수의 집이라는 고인 시인의 거처를 마련하는 데 성공했다. 문화향수의 집은 9억5000만원을 들여 방치된 폐가를 리모델링했다. 고은 시인은 성추행 가해자로 지목된 뒤 고은재단을 통해 수원시를 떠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수원시는 현재 고은 시인이 떠날 문화향수의 집 활용 방안을 고심 중이다. 지역 문인들에게 창작 공간으로 제공할지, 생태학습장으로 활용할지 아직 결정하지 못한 상태다.

밀양시, 이윤택 주도 예술제 폐지 고민

도요창작스튜디오

도요창작스튜디오

경기도 수원에 건립하려던 고은 문학관은 결국 무산됐다.

수원시와 고은재단은 28일 협의를 거쳐 고은 문학관 건립계획을 최종 철회했다. 시와 재단 측은 이날 “최근 고은 시인 관련 국민 여론을 반영해 이같이 결정했다”고 밝혔다. 수원시는 팔달구 장안동 한옥기술전시관 뒤편 시유지 6000㎡에 문학관을 건립할 계획이었다. 200억원의 건립비는 고은재단 측이 내고, 시는 부지를 무상으로 제공하기로 했다.

경남 밀양시는 이윤택 ㈔밀양연극촌 이사장의 성추문이 불거지자 지난달 19일 연극촌과의 무료 위탁운영 계약을 해지했다. 이에 부북면에 있는 밀양연극촌 시설 활용방안과 각종 공연예술축제 진행 여부가 문제로 떠올랐다. 당장 밀양연극촌의 주도로 해마다 7월께 해 왔던 여름공연예술축제를 어떻게 할지 고심 중이다. 6억5000만원의 예산이 지원되는 지역 최대 축제 중 하나였다. 밀양시와 시의회가 계속 개최 여부를 놓고 논의 중이지만 ‘이윤택 흔적 지우기’가 우선이란 정서가 강해 개최 여부는 미지수다. 게다가 하용부 밀양연극촌장의 성폭행 의혹까지 불거져 지역의 여러 공연도 차질이 예상된다.

김해시도 지난달 20일 이윤택씨가 대표로 있는 김해예술창작스튜디오의 운영단체인 도요창작스튜디오와의 위·수탁 협약을 해지했다. 이작초등학교 도요분교에 자리한 김해예술창작스튜디오는 김해시가 경남교육청에서 부지를 빌려 2009년부터 이씨에게 위탁했다. 김해시는 매년 운영비 4000여만원을 지원했다. 김해예술창작스튜디오가 주관해 온 ‘도요마을 강변축제’와 ‘연극체험 프로그램’ 사업보조금 지원도 취소됐다. 올해 이 두 행사엔 5500만원의 예산이 지원될 예정이었다. 김해시 관계자는 “계약 해지가 급하게 내려진 조치라 지금으로선 이 공간을 어떻게 써야 할지 별다른 계획이 없다”며 “사태를 지켜본 뒤 후속 대책을 논의할 방침이다”고 전했다.

유명 사진작가 배병우(68)씨의 이름을 딴 문화예술 공간을 조성했던 전남 순천시도 난감한 처지에 놓이기는 마찬가지다. 순천시는 배 작가가 서울예술대 교수 재직 당시 제자들에게 성추행과 성희롱을 했다는 보도가 나온 직후인 지난달 23일 문화의 거리 내 ‘배병우 창작스튜디오’를 폐쇄했다. 순천시가 지난해 문화재생을 통해 도시재생을 활성화하겠다며 총 6억원을 들여 지은 지상 3층, 연면적 168㎡ 규모의 공간이다.

순천시, 6억 들인 배병우 창작관 폐쇄

배병우 창작스튜디오

배병우 창작스튜디오

배 작가는 이곳에서 사진 전시를 비롯해 지역 학생과 시민 대상 교육 프로그램 운영, 토크콘서트 진행 등을 해 왔다. 최소 5년 이상 활용할 목적으로 신축했던 스튜디오 건물은 당분간 아무런 쓸모가 없게 됐다. 황학종 순천시 도시재생팀장은 “배 작가가 그런 일을 저질렀을 것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다”며 “이미 사업을 추진했는데 다소 난감하다. 스튜디오 건물은 지역 문화예술인들과 협의해 활용 방안을 검토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울주군, 박재동 산악영화제 처리 고심

박재동. [연합뉴스]

박재동. [연합뉴스]

시사만화가 박재동 화백의 성폭력 논란과 관련해 울산시 울주군은 박 화백의 입장 표명을 기다리고 있다. 박 화백은 2015년부터 울주세계산악영화제의 집행위원장을 맡고 있다. 울주군이 영화제를 관리·감독하고 후원한다. 사단법인 울주세계산악영화제 측은 “아직 거취를 논할 단계가 아니다”면서도 지난달 27일 예정돼 있던 법인 출범식을 무기한 연기했다. 박 화백은 울주군 출신이다. 영화제 관계자는 “영화제 초기 열정적으로 헌신할 수 있는 울주군 출신의 명망 있는 문화예술인을 찾았다”고 위원장 선정 배경을 밝혔지만 부메랑이 됐다. 이승진 울산시민연대 팀장은 “인지도와 지역 연계성을 앞세운 셀럽 마케팅보다 콘텐트 등 내실에 신경 써야 한다”고 지적했다.

천은숙 수원대 학술연구 교수 역시 “셀럽을 내세운 마케팅에 나섰던 지자체였지만 이들이 성폭력 가해자로 지목되면서 곤혹스러울 것”이라며 “앞으로 문화예술인에게 공간을 지원할 때 더 신중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수원·밀양=김민욱·위성욱 기자, 임선영 기자 kim.minwo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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