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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시 한수] '직업병'이라는 훈장 또는 한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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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새벽의 시집 읽기(2)

현역 때는 틈틈이 이런저런 책을 통해 필요한 정보들을 얻었다. 인터넷 사용법부터 블록체인에 이르기까지. 은퇴 후에는 조금 다르다. 비트코인과 인공지능보다는 내 마음을 채워줄 따뜻한 말 한마디가 더 필요하다. 어쩌면 시 읽기가 그것을 도와줄지도 모른다. 중장년층에 필요할 만한, 혹은 그들의 마음을 움직일 시를 소개한다. <편집자>

포항 죽도시장 어시장에서 판매하고 있는 각종 어류. [중앙포토]

포항 죽도시장 어시장에서 판매하고 있는 각종 어류. [중앙포토]

어시장 거닐다가 죽 늘어선 생선을 본다.

요리사인 동한이는 “통째로 튀겨서 칠리소스 발라 먹으면 맛있지”라며 생선 꽁지 들어 끓는 기름에 넣는 시늉 한다. 치익-하고 생선 튀겨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도 하다.

어부 아들 창훈이는 “저거 한 마리 더 낚겠다고 그 겨울에도 그 고생을…”이라며 생선 꽁지 들어 패대기치는 시늉 한다. 고향께 바라보며 뜨거워진 눈시울이 다 큰 사내들의 가슴을 적신다.

과학 선생 지윤이는 “여기가 등지느러미, 이 안쪽에 부레…”라며 생선 꽁지 들어 강의하는 시늉 한다. "징그러워!"하는 아이들 맑은 목소리 울리는 듯도 하다.

영업사원인 나는 “마리당 일만 원인데 마진이 삼십 프로면 삼천 원에, 월세, 인건비, 관리비, 매입원가 빼면 한 달에 최소…”라며 생선 꽁지 들어 올린다. 문득 시 한 편 떠오른다.

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 함민복 지음.

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 함민복 지음.

좌판의 생선 대가리는
모두 주인을 향하고 있다

꽁지를 천천히 들어봐

꿈의 칠할이 직장 꿈이라는
샐러리맨들의 넥타이가 참 무겁지

-함민복, <금란시장> 전문, 시집 <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창비, 2013)> 수록

직장인에게는 비슷한 습관이 있다. 종일 직업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딱히 직업적이지 않아도 되는 순간조차 직업적으로 나서고 마는 습관이다. 그걸 직업병이라고 한다. 그래서 꿈도 직장 꿈을 꾼다. 직업병은 직장에 헌신한 프로들의 훈장 같아 뿌듯한 경우는 극히 드물고, 대개 한숨을 불러온다.

어떤 기타리스트는 여덟 살 때부터 기타를 끼고 살아 갈비뼈가 기타 모양에 맞춰 자랐다고 한다. 그이는 그래도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선율을 들려줄 수 있겠지. 나의 뇌는 계산을 끼고 살아 사고가 영업활동에 맞춰 작아졌는데, 업무 시간 외에는 딱히 쓸 데가 없는 능력이다. 휴.

말랑말랑한 힘. 함민복 지음.

말랑말랑한 힘. 함민복 지음.

직장 다니고 있는 지금은 괜찮다. 다만 은퇴 후에도 오로지 계산적인 생각만 하고 있지 않으려면 지금부터 훈련해야겠다. 딱딱해진 머리를 ‘말랑말랑’하게 만드는 훈련 말이다. 말랑말랑하게라, 과연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러고 보니 직장 생활을 하다가 문학 공부를 시작했다는 어떤 시인의 책 중에도 <말랑말랑한 힘>이란 시집이 있었다.

그것부터 읽어보면 어떨까.

함민복 시인

-1962년 충북 충주 출생
-1988년 세계의 문학 ‘성선설’으로 등단
-시집 <말랑말랑한 힘>, <당신 생각을 켜놓은 채 잠이듭니다> 등 출간

전새벽 회사원·작가 jeonjunhan@naver.com

비트코인의 탄생과 정체를 파헤치는 세계 최초의 소설. 금~일 주말동안 매일 1회분 중앙일보 더,오래에서 연재합니다. 웹소설 비트코인 사이트 (http:www.joongang.co.kr/issueSeries/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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