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유견문' 쓰는 한국야구, 아자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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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고종께서 즉위하신 지 18년째 되는 신사년(1881년) 봄에 나는 동쪽으로 일본 신사유람단 일원으로 시찰하러 갔었는데, 그곳 사람들의 부지런한 습속과 사물의 풍성한 모습을 보니 내가 혼자서 생각했던 것과 달랐다."(중략)

"사람은 어리석은 동물이라서, 처음 태어날 때는 아는 것이 없다. 지식은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얻어지는 것이다. 아이가 태어나면 부모가 올바른 것을 가르쳐 그의 지식을 먼저 열어주고, 나이가 차츰 자라남에 따라 학교에 나아가 지식을 더욱 연마하게 되기 때문에, 천하에 급한 일 가운데 학교를 설치하는 것보다 더 급한 일은 없다."(중략)

'서유견문' 제3편 '국민의 교육' 가운데 일부분이다. 1895년 조선 최초의 일본.미국 유학생이었던 유길준은 '서유견문'을 썼다. '서유견문'은 서양의 문물을 우리에게 처음으로 소개한 책이다. 유길준은 이 책을 통해 개화의 당위성을 내세웠다.

'서유견문'이 나오고 111년이 지난 2006년. 한국 야구가 일본.미국으로 견문을 넓힐 기회를 가졌다.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WBC)이었다. 한국 야구가 단발적으로 일본.미국에 건너가 선진 야구를 받아들이고, 개화의 필요성을 느낀 적은 많았지만 이처럼 최고의 선수들이 모여 직접 체험의 기회를 갖기는 처음이었다. 그래서 WBC는 '야구가 서유견문을 쓸 수 있는 기회'라고 볼 수 있다.

이승엽(요미우리)은 말한다. "미국에 와서 보니 일본보다 더 좋다. 특히 운동장의 시설과 그라운드 상태는 최고다. 작은 돌멩이 하나 없다. 이런 데서 야구를 하면 정말 열심히 하고 싶은 생각이 들 것 같다"고. 한국은 7경기를 치르면서 단 한 개의 실책도 저지르지 않았다. "미국 그라운드 상태라면 평생 에러 하나 안 할 수 있겠다"는 내야수 김민재(한화)의 말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비만 오면 논바닥이 되는 야구장. 지자체의 '나 몰라라'식 관리 탓에 선수들이 실책과 부상의 위험 속에 뛰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낙후된 대전.대구.광주 등의 운동장을 개선하는 건 정말 시급한 일이다.

박찬호(샌디에이고)는 말한다. "메이저리거의 기량과 인품을 칭찬하기 전에 우리 프로야구선수들이 교육받을 기회를 얼마나 가졌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고. 프로야구선수협을 통해 다양한 세미나.재교육이 이뤄져야 한다고. 그래야 '야구만 잘하는 야구 기계'의 수준을 벗어나 사회적으로 프로야구 선수가 존경받고, 인정받는다고. 한국야구위원회(KBO)의 국제적 행정력도 마찬가지다. 이런 기회를 가져야 부족한 걸 발견할 수 있고, 그래야 배움의 필요성을 느낀다.

이제는 보고 느낀 걸 실행해야 할 때다. 야구 인프라 개선과 선수.관계자의 교육을 통한 선진화. 이게 WBC가 남겨준 교훈이다.

샌디에이고=이태일 야구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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