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박한 땅에서 피워낸 맛 교황의 미사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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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1호 28면

와인 이야기

샤또 까브리에르 1971. 타닌과 신선함이 생생하게 살아있어 50년 이상 숙성이 더 가능하다.

샤또 까브리에르 1971. 타닌과 신선함이 생생하게 살아있어 50년 이상 숙성이 더 가능하다.

생일을 맞은 지인이 자신의 빈티지라며 와인 한 병을 가져왔다. 노란 레이블 위에 장식체로 쓴 ‘샤또 까브리에르(Chateau Cabrieres)’와 1971이란 숫자가 눈에 확 들어왔다. 병에는 교황의 모자와 천국으로 들어가는 두 개의 열쇠가 양각으로 장식되어 있고 ‘샤또네프 듀 빠쁘(Chateauneuf du Pape)’란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순간 필자가 젊은 시절 우연히 방문해 시원한 물 한 모금과 와인 몇 잔을 얻어 마시던 곳이 홀연 떠올랐다.

‘교황의 와인’으로 알려진 샤또네프 듀 빠쁘는 교황이 로마 교황청으로 들어가지 못했던 아비뇽 유수 시절 여름 별장을 짓고 아비뇽에서 가져온 포도나무로 포도밭을 조성한 곳이다. 이 지역은 오래 전 강의 범람으로 옮겨진 둥근 자갈들이 테라스처럼 펼쳐져 있어 포도 재배에는 적당하지 않다고 여겨졌다. 그러나 척박한 환경에서 자란 포도로 만든 와인은 특별한 맛을 냈고, 급기야 교황의 미사주로 발탁되면서 크게 유명해졌다. 교황이 사용하던 언덕 위 건물은 전쟁 당시 독일군이 파괴해 지금은 한 쪽 벽면만 남아 있지만, 석양이 지면 붉게 물드는 주변 포도밭이 숭고하면서 장대한 모습을 연출한다.

샤또 까브리에르는 샤또네프 듀 빠쁘 마을로 향하는 중간에 있다. 14~15세기 이 성에서 사용했던 빵을 굽던 오븐의 문이 우연히 발견되며 샤또의 연대가 증명됐다. 역사는 오래됐지만 와인을 생산한 것은 아르노(Arnaud) 가문의 1세대로 1950년대다. 지금은 3세대인 아네(Agne)와 그의 남편 빠트릭 베르니에(Patrick Vernier)가 운영을 책임지고 있다.

이 샤또의 포도밭은 샤또네프 듀 빠쁘 지역에 나타나는 대표적인 3가지 형태의 토양 구조를 모두 갖고 있다. 어린아이 머리만한 둥근 자갈과 섬세한 와인을 만들도록 도와주는 모래, 와인의 특성을 살려주는 석영질 돌과 오랜 세월 변형을 거친 점토질이다. 이들은 서로 조화롭게 구성돼 개성 있는 포도를 생산한다. 굵은 자갈은 이 지역의 강한 바람 미스트랄로부터 포도밭을 보호한다. 강한 바람에 가벼운 토양은 모두 날아가고 자갈만 남는데, 위층에 있는 굵은 자갈은 바람으로부터 포도나무를 보호하고 그 아래 자리잡은 영양 많은 점토와 모래층은 포도나무가 물과 영양을 잘 흡수할 수 있게 도와준다. 현재 샤또는 13종의 품종으로 그들만의 유니크한 와인들을 생산하고 있다.

90년대 중반 자전거로 샤또네프 듀 빠쁘 마을을 혼자 여행한 적이 있다. 두 시간쯤 달려 허물어진 교황의 성이 보일 때쯤, 우연히 샤또 까브리에르의 포도밭에서 수확하는 사람들을 만났다. 마침 정원에서 뜨개질을 하고 계시던 주인 할머니의 배려로 물과 와인도 얻어 마셨다. 그리고 20년 후 프랑스 남부의 와인 전시장에서 우연히 까브리에르를 시음하게 되었다. 너무 오래전이라 바로 샤또를 기억하진 못했는데, 지금의 오너가 할머니의 딸과 사위라는 사실을 나중에 알고 인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샤또 까브리에르의 와인들은 최고의 빈티지가 아니더라도 50년 이상 숙성이 가능해 놀라움을 주고 있다”는 기사가 프랑스 유명 와인 잡지에 실린 적이 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1971년 산이다. 필자는 이 와인을 마시며 ‘와인이 숙성된다는 것은 스스로 맛을 보정하며 균형을 잡아가는 과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가 난 부분을 조금씩 깎아내고 다듬어 둥글게 만드는 모습이 마치 그 지역 둥근 자갈의 모습 같았다. 나도 나이가 들면 이런 맛과 모양을 가질 수 있을까? 죽기 전에 더 많은 와인을 마셔야 가능하지 않을까 싶어 깊이 반성했다.

김혁 와인·문화·여행 컨설팅 전문가
www.kimhyuc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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