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추행 잠적' 24일 만에 나타난 최연희 의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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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자 성추행과 관련해 잠적했던 최연희 의원이 20일 국회에서 피해자와 국민에게 사과한 뒤 기자회견장을 빠져나가고 있다. 오종택 기자

'미안하다. 그러나 못 떠난다'.

최연희 의원이 24일 만에 나타나 10분간 읽어 내려간 회견문을 요약하면 이렇다. 최 의원이 20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여기자 성추행 사건 이후 그는 연락을 끊은 채 강원도에 머물러 왔다. 하지만 오랜 고민 끝에 밝힌 거취는 많은 이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초췌한 표정으로 회견장에 선 최 의원은 준비해온 '사과합니다'라는 제목의 글을 읽었다. 그는 "공인으로서 물의를 일으켜 국민께 진심으로 사죄드린다"며 "무엇보다 당사자인 여기자에게 어려움을 드린 점을 사죄드린다"고 말했다.

사과는 여기까지였다. "공복(公僕)으로 부끄럽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 해왔다"고 다시 입을 뗀 최 의원은 오히려 자신이 겪은 고통을 호소했다. "회한의 눈물을 흘리며 죽음의 문턱도 다녀왔다" "아비 노릇 한번 제대로 못해준 자식이 떠올라 죽을 수도 없었다" 등등. 이어 그는 "저를 잘 아는 동료들에 의해 사퇴촉구 결의안이 발의됐다는 사실을 들었다"며 한나라당에 대해, "언론 보도를 통해 죽일 ×이 돼버렸다"며 언론에 대해 섭섭한 마음도 표시했다.

관심을 끈 것은 거취 관련 부분이었다. 최 의원은 "법에 따르겠다. 다만 최선을 다했던 국회의원 최연희에 대한 최종 판단을 그때까지만 유보해 달라"고 말했다. 성추행 혐의가 유죄로 밝혀지기 전까진 의원직을 내놓을 수 없다는 뜻이다.

이런 입장 발표에 회견장은 아수라장이 됐다. 민주노동당 여성 당직자 5명은 "성추행범은 사퇴하라" "×팔리지도 않느냐"고 외치기 시작했다. 이 사이 글을 다 읽은 최 의원은 회견장을 빠져나갔고 보좌진과 추가 질문을 하려던 취재진 사이엔 몸싸움까지 벌어졌다. 자기가 필요한 말만 하고 사라진 5분 회견이었다.

회견 후엔 비난이 쏟아졌다. 한국여성단체연합 등 여성단체들은 "국회의원으로서 보여야 할 최소한의 양심마저 저버렸다"는 성명을 내놨다. 열린우리당 우상호 대변인도 "모든 방법을 동원해 최 의원을 사퇴시키겠다. 필요하면 법도 바꾸겠다"는 당의 입장을 밝혔다.

한나라당은 말을 아꼈다. 이계진 대변인은 "당과 연관지어 말하지 않는 게 옳겠다. 자신의 계획에 따른 것이기 때문"이라고만 말했다. 의원총회도 열렸지만 박근혜 대표나 이재오 원내대표는 이 문제를 언급하지 않았다.

하필 한나라당은 이날부터 24일까지를 '천막초심 실천기간'으로 선포했다. 천막당사에서 고생하던 2년 전을 떠올려 각오를 다지자는 행사다. 하지만 바로 이날 당의 대선주자인 이명박 서울시장은 '황제 테니스 의혹'을 해명하느라 진땀을 뺐다. 전 사무총장인 최 의원도 책임지지 않는 태도로 비난을 샀다.

남궁욱 기자 <periodista@joongang.co.kr>
사진=오종택 기자 <jongta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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